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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마다 학점 커트라인 등장 … 고교 ‘4학년’, 전공재수생 양산
전공마다 학점 커트라인 등장 … 고교 ‘4학년’, 전공재수생 양산
  • 손혁기 기자
  • 승인 2001.07.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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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4 16:33:56
2001년 대학입시도 한참 지난 올해 1월 연세대 자유게시판에는 색다른 ‘커트라인’이 발표됐다. 이제 2학년이 되는 2000학번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전공선택의 자율권 보장’을 요구하는 모임이 발표한 이 ‘커트라인’은 다름 아닌 전공배정 합격 점수.

연세대는 지난해 말 2000학번들에 대해 1차 전공배정을 했다. 이 과정에서 대학은 인기전공에 정원이상으로 학생들이 몰리자 학점에 따라 전공배정을 했고, 학생들은 각 전공마다 합격자와 탈락자들의 현황을 모아 집계한 결과를 올린 것. 사회계열 경영학과 ‘3.21 승인 받음’, ‘3.20 떨어짐’, 사회계열 경제학과 ‘2.85 승인 받음’, ‘2.80 떨어짐’, 사회계열 법학과 ‘2.85 승인 받음’, ‘2.83 떨어짐’ 등으로 발표된 이 커트라인은 1천 번이 넘는 조회수를 보이며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모집단위 광역화 도입이후 대학 1학년을 ‘고등학교 4학년’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점수에 따라 전공을 배정하면서 대학입시제도의 부작용은 학문간 서열화, 학점경쟁 등으로 대학교육 현장에 그대로 옮겨 왔다.

인기전공 선택 두고 학점전쟁

‘커트라인’을 게시판에 올린 학생은 “학문간 서열화가 우려되기는 하지만, 주변의 친구들이 전공 때문에 고민하면서도 시원한 답변하나 들을 수 없어 갑갑했다”며 작성이유를 애써 설명했다. 아예 대학에서 친절하게 전공입시 상담을 하는 대학도 있다. 성균관대 게시판에서는 영문학 전공과 중문학 전공의 커트라인을 묻는 학생의 질문에 대학이 직접 지난해 전공별 커트라인과 올해의 휴학생수, 커트라인이 높아지는 경향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 놓고 있다.

원하는 전공을 배정 받으려면 무엇보다 학점을 잘 받아야 하기에 1학년들의 수강신청 경향도 변화하고 있다. 노대영 성균관대 학생회장은 “학점을 잘 받기 위해 교수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정확한 전공과목을 수강하는 1학년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을 우선 선택하면서 다양한 전공을 접해보고 선택을 하게 한다는 본래 취지가 퇴색되고 있는 것.

무엇보다 학점에 의한 전공배정은 학생들간의 배타적인 학점경쟁을 불러오고 있다. 고려대 인문대의 한 교수는 “지난해 5월 대동제를 전후해서 출석률이 유난히 적은 날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너도나도 출석을 부르자고 하는 걸보고 놀랬다”며, “친구보다 학점이 먼저인 학생들을 만드는 현재 교육과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탈락하는 학생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 희망하는 전공을 선택하지 못했던 연세대 한 학생은 “광역화가 전공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인 줄 알고 마냥 좋아했는데 잘못 알았다”며 “이럴 줄 알았다면 학과가 정해진 대학에 갈 것을 잘못 했다”고 후회했다.

희망 전공을 배정받지 못해 전공재수를 하는 학생들도 늘어나고 있다. 서울대 자연대에서 올해 지방한 전공에 탈락한 38명 가운데 18명은 2차 전공을 선택해 3학년이 됐으나 나머지 20명은 2002년 전공모집 때까지 전공재수를 시작했다. 당연히 학생들의 시간과 돈이 낭비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정진농 부산대 교무처장은 “법학·의학 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 학부생의 장기 재학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환경조성없이 밀어부치기만

모집단위 광역화가 불러오는 부작용은 대학과 학생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이현청 대교협 사무총장은 학부제 도입과 관련 “교과과정 편성에서 국가 산업인력의 균형적인 공급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장에는 중요하지 않은 분야라도 산업구조상 반드시 유지돼야 하는 학문이 위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소위 인기과목으로 몰려가는 경향이 심해지자 학생선택권 보장 자체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회의적인 주장도 설득력을 얻는다. 노대영 성균관대 인문대 학생회장은 “학과마다 서열이 매겨지면서 높은 학점을 받고도 커트라인이 낮은 전공을 선택하면 손해를 본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며, “일부 학생들은 대학입시처럼 커트라인에 따라 전공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학부제로 학과목 이외의 일은 참여하기 어렵다. 학점의 노예가 돼버렸다”는 학생들의 솔직한 고백에 교육부는 “일부 학생들이 학생운동이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70년대 군사 정권이 학생운동을 말살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도입했던 학부제와 현재의 ‘모집단위 광역화·학부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운동 말살’의 목적이 ‘대학구조조정’이나 ‘대학입시경쟁 완화’로 바뀌었더라도 제도 정착을 위한 지원과 제도개선을 위한 고민이 선행되지 않고 학생들에게 먼저 적용하고 보는 ‘밀어 부치기’ 방식은 7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손혁기 기자 phar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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