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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와 박물관, 감각과 지식의 상응
미술사와 박물관, 감각과 지식의 상응
  • 김한결
  • 승인 2022.11.24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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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30 서양미술사를 학문으로 다시 보기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내가 18세기 말 혁명기 박물관이라는 
매우 낯선 영역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다. 
박물관과 전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여러’ 기원 중 하나를 탐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과 박물관의 역사에서 프랑스 혁명기는 
18세기를 이끌어온 지식-사상적 패러다임이 일단락되었으며, 
또 새로운 인식론이 출발하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지가 되었다. 

미술사를 전공한다고 말하면 “그림 잘 그리겠네”라는 칭찬(?)이 돌아온다는 자조적인 농담에서처럼, 미술사는 오해를 사기 쉬운 분야다. 미술사는 말 그대로 미술의 역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미술의 역사란 미술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형태 또는 시도를 통해 표현되는 인간 정신과 물질의 역사를 의미한다. 물론 미술품의 외양, 상징(성)이나 가치, 또는 미술가의 의도, 기술적 숙련도, 심리와 같은 주제를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서술하기란 대단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연구자의 도전 의식을 한껏 자극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미술사 연구자로서 나의 시선 역시 하나의 미술작품, 작가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 바깥의 프레임, 즉 서술, 전시, 수집의 역사에까지 닿아있다. 그중에서도 나의 주된 관심사에 해당하는 것은 18세기 프랑스의 미술사·박물관사이다.

박물관은 과거와 현재의 문화를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장소/제도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물질과 지식을 전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를, 또 그것이 변천해 온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의 기원과 발전이 국가의 서사와 맺어온 협력 관계를 지적한 도미니크 풀로(Dominique Poulot)의 『박물관 국가 문화유산』(Musée Nation Patrimoine 1789-1815)이 보여주듯이, 박물관은 집단기억과 상호 작용하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참여하기도 한다.

2018년 말 발표한 박사논문에서 나는 프랑스 혁명기 박물관이 미술 전시를 통해 국가와 역사의 이미지를 어떻게 조형하는지를 다루었다. 석사 과정에서 1851년 만국박람회를 연구했던 내가 18세기 말 혁명기 박물관이라는 매우 낯선 영역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다. 박물관과 전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여러’ 기원 중 하나를 탐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각, 특히 시각과 지식의 상응에 대한 믿음

1793년 문을 연 루브르박물관 외에도, 박사논문은 혁명기에만 존속했던 프랑스유물박물관(Musée des Monuments français), 마찬가지로 혁명기에만 짧게 운영되었던 베르사유의 프랑스유파특별박물관(Musée spécial de l’École française), 이후 7월왕정 치하에서 역시 베르사유에 세워진 프랑스역사박물관(Musée de l’histoire de France) 등을 함께 살펴보았다.

루브르 내에서는 아폴론 갤러리(Galerie d’Apollon), 앙굴렘 갤러리(Galerie d’Angoulême)와 같은 각각의 전시관이 지닌 역사성을 조명했다. ‘눈에 보이는 미술의 역사’를 표방한 박물관은 시간의 흐름을 선(線)과 같은 공간으로 주조했고, 과거 거장들의 이름은 이제 색인에서 계보로 옮겨졌다.

혁명 이후, ‘프랑스 미술’의 역사는 근대의 지적 의식에 따라 새롭게 규정되었다. 프랑스 미술의 발전사는 당대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역사서술의 논리에 입각하여 다시 쓰였고, 이를 시각화하는 것은 박물관의 몫이었다.

루브르박물관 대회랑은 관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실험의 장이었다. 위베르 로베르, <루브르 대회랑 개조 계획>, 1796년, 캔버스에 유화, 루브르박물관 소장.

막상 발을 들여놓고 보니, 18세기 후반은 루브르를 논외로 하더라도 미술과 박물관의 역사에서 더없이 흥미로운 시기였다. 감각, 특히 시각과 지식의 상응에 대한 믿음은 당시 여러 계몽주의 지식인이 미술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 눈길을 돌리도록 자극했다. 미술이 주관적 감상의 대상으로 자리 잡음에 따라, 최적의 감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전시 공간에 대한 고민이 등장했다.

전시 공간에 작품과 동선을 합리적으로 배치하기 위해서는 미술사적 지식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에, 미술은 비로소 지적인 실체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미술을 창작하는 동기, 이를 사람들이 수용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새로운 이론이 전개된다. 과거 예술이 신과 인간과의 관계, 또 왕정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주종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파악되었다면, 혁명은 평등과 공리의 원칙에 따라 이를 다시 쓰고자 했다.

구체제 권력을 상기하는 모든 ‘이미지’를 파괴하려는 이른바 반달리즘(vandalisme)의 풍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미술작품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미술이 공익에 이바지한다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난 덕택이었다.

혁명이라는 필터를 거치며 학문의 영역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전주의 미술사관에서 야만적인 것으로 폄하되었던 중세 미술이 혁명기에 그 가치를 새롭게 인정받은 것은 상징적이다. 18세기 말 미술수집가이자 미술사가인 스루 다쟁쿠르(Jean-Baptiste-Louis-Georges Seroux d’Agincourt)는 중세 미술을 미적 가치의 판단과 별개로 역사를 온전히 구성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사슬고리로 인식했다.

1960년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가 제시한 복수의 르네상스 개념을 통해 서양 중세 말-초기 르네상스 시기가 재평가되기까지, 고전고대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미술사에서 독점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고려하면 스루 다쟁쿠르의 주장은 당대에 그야말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미술과 박물관의 역사에서 프랑스 혁명기는 18세기를 이끌어온 지식-사상적 패러다임이 일단락되었으며, 또 새로운 인식론이 출발하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지가 되었다.

같은 작가의 <원숭이 화가>와 한 쌍을 이루는 이 작품은 고미술애호에 대한 당대의 시각을 보여준다.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원숭이 골동학자>, 1740년, 캔버스에 유화, 루브르박물관 소장.

비록 한국에서 이 시대의 미술사와 박물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이는 많지 않으나, 나는 내가 연구하는 주제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혁명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미술작품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구체적인 기준과 방법이 마련되었고, 이를 통해 미술은 비로소 객관적 지식과 학문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는 미술사라는 학문의 정수를 파악하기 위해 유념해야만 하는 사실이다. 프랜시스 해스켈(Francis Haskell)이 『역사와 이미지』(History and its images)에서 자세히 다루었듯, 미술은 역사학과 특히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고대 주화부터 장식 미술, 조각상, 삽화까지 역사를 해독하고자 하는 이에게 과거의 미술작품은 접근이 용이한데다 다소나마 신빙성을 보장할 수 있는 (또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다. 미술작품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역사학은 미술의 중요한 동반자였다.

한때 고미술애호 또는 ‘골동학(antiquarianism)’이라는 멸칭 하에 학문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과거의 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고고학과 미술사가 성립하면서 다시금 체계와 이성과 영합한다. 해스켈의 작업은 미술사, 문화사, ‘골동학’, 그리고 수집과 취향의 역사를 지성사의 틀 안에서 다룬다. 요컨대 미술사는 한 작품의 프레임 바깥의 프레임, 다시 또 그 바깥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뻗어나간다.

가끔 미운 오리 새끼 같은 고독함

이런 까닭에 나는 가끔 미술사가 ‘인문학의 꽃’과 같다고 학생들에게 자랑스레 말하고는 한다. 동시에 그것이 여러 인문학 분과 가운데서 특히 ‘마이너한’ 학문이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또 비장하게 받아들인다. 고유한 영역으로서 미술사를 연구하는 학과를 찾아보기 어려운 국내 대학의 현실 속에서 미술사에 잠재한 깊이와 외연이 충분히 실현되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국내 대학에서 미술사는 종종 보다 ‘실용적’이거나 더욱 ‘상위’ 학문이라 간주되는 근접 분야에 편입되고는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탁월한 서양미술사 전공자들이 미술대학 실기과, 사학과, 문화콘텐츠학과, 또는 외국어문학과 등에 흩어져 있으며 여기저기서 미술사가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광경은 어느덧 친숙하다(나 역시 두 번째 석사 시절 박물관·문화유산의 역사와 이론을 전공한 덕에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 관련 실무 활동에 참여하고는 한다).

학계에서 미술사는 종종 역사학의 한 분과로 간주되며, 미술사가들 또한 일련의 역사학적 방법론과 문헌 독해방식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훈련받는다. 나 역시 역사학 전공자들과 공동으로 작업하게 되는 기회가 적지 않다. 그러한 기회에 감사하면서도, 가끔은 스스로가 ‘깍두기’ 내지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것마냥 고독함을 느끼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연구자들이 많은 근현대 또는 르네상스와 달리, 서양미술사 관련 학회에서 18세기 전공자의 수는 많지 않다. 또 다른 18세기 미술사 전공자가 지적하듯이, 한국의 서양 근세미술사 전공자는 본인이 자기 연구 분야의 유일한 전문가인 경우가 많다(전동호, 「내수용 서양미술사의 빛과 그림자」, 『역사학보』 243 (2019): 481-499). 이러한 조건에서 전공자 간의 생산적인 토론이나 협업을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는가는 쉽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다.

미술사 자체로는 ‘콘텐츠’가 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인문학 연구자들이 숙명처럼 짊어진 숙제, 즉 눈에 보이는 성과, 업적, 결과물을 하루빨리 토해내라는 압박은 미술사가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 연구에는 길고 긴 호흡이 필요하며, 이는 미술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술사가들이 숨 고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술사가 경영과 마케팅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오늘날 학계 안팎의 적지 않은 기대와 달리, 미술사는 그 자체로는 ‘콘텐츠’가 될 수 없다. 미술사가를 포함해 어떤 인문학자도 학문이 콘텐츠의 동의어가 될 수 있으리라 진심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나마도 흔치 않은 서양 미술 관련 전시에 붙은 (별다른 의미는 없는) 갖가지 화려한 이름들, 다양한 가상, 몰입형, 실감형 전시 콘텐츠 홍보물, 여러 인터넷 매체를 떠도는 토막 지식, 아트페어와 미술품 재테크 관련 뉴스 사이에서 부유하다보면, 오늘날 미술사에, 또 인문학에 덧씌워진 경제적인 필요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실용적인지’ 묻게 된다.

미술사가들은 전공과 교양 사이 어딘가 기적처럼 개설된 미술사 수업에서 마주치는 학생들의 진지함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호흡을 이어간다. 이미지, 역사, 박물관, 그리고 지성의 장구한 역사를 자못 숙연한 마음으로 펼쳐내면서, 우리는 다음에 올 미술사가들이 발 디딜 수 있는 작은 토양을 준비하고 있다.

김한결 중앙대 HK+접경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프랑스 파리1대학 팡테옹소르본에서 중세미술사, 근세미술사, 박물관과 문화유산의 역사와 정책 등을 공부했다. 2018년 12월 「프랑스 국가주의 미술사 담론의 형성과 ‘과거의 거장’의 활용, 1780-1850」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8세기 유럽의 미술사, 특히 미술 저술, 제도와 수용의 역사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있으며, 오늘날 한국의 미술과 박물관의 생태계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역서  『박물관의 탄생』(돌베개, 2014), 공저  『팬데믹의 시대에 경계를 바라보다』(소명출판, 2022)를 냈다. 주요 논문과 서평으로 「17-18세기 프랑스 예술품 컬렉션의 판매 도록 연구: 피에르-장 마리에트와 새로운 양식」(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제57호), 「글로 쓴 역사, 그려진 역사-베르나르 드 몽포콩의 『프랑스 왕국의 유물』에 관하여」(프랑스사 연구 제44호),  「평전은 역사가 될 수 있는가」(『교차』 3호, 읻다, 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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