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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중첩이 빚어낸 두터운 형상
시간의 중첩이 빚어낸 두터운 형상
  • 박평종 명지대
  • 승인 2006.05.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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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 순간의 미학에 저항하는 천경우

▲One-Hour Portrait ©
在獨 사진가 천경우는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이다. 그 동안 국내외 유수의 화랑과 미술관에서 보여 준 작품들을 보면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성의 사투를 벌여왔는지를 알 수 있다. 작품에 대한 견해를 밝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고전적인 사진 개념에 대한 의문임을 은유적으로 피력해 왔다. 명증성의 힘에 기대어 시야의 변방으로 쫓겨난 변두리 세계를 기록하는 데 주력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심미적 취향에 호소함으로써 새로운 미의 규칙을 찾아나가는 예술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은 오랫동안 찰나의 시간을 붙잡아두는 유효한 기계장치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젤라틴브로마이드 건판사진이 일반화되는 19세기 후반 이후 순간이라는 시간은 사진의 미학적 규칙을 지배하는 범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미학자나 비평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천경우는 사진 작업을 통해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근원에서부터 이 오래된 시간 개념에 질문을 던진다.  ‘One-Hour Portrait’ 시리즈는 한 시간 동안 미세한 빛이 축적되어 만들어낸 사람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60분의 1초나 125분의 1초라는 스냅사진의 일반적인 노출시간에 비하면 한 시간이라는 노출은 그야말로 영겁에 가깝다. 이러한 장시간의 노출이 새롭지는 않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니에프스의 작품은 8시간의 노출 끝에 얻은 이미지였고 최초의 사진술이었던 다게르의 은판사진도 초기에는 1시간 이상의 노출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는 기술적 제약이 야기한 물리적 한계였을 뿐 사진의 의미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한 시간 동안 얼굴에 쏟아지는 빛이 차곡차곡 쌓여 빚어낸 천경우의 사진에서는 빛의 중량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한 시간의 촬영을 견뎌내기에 가장 편한 자세인 무표정 때문에 인물의 개성을 찾아보기란 어렵지만 정작 작가에게 촬영 대상은 별 의미가 없다. 그의 사진이 주는 무겁고 두터운 느낌은 촬영 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에서 온다. 쉼 없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피사체가 얼굴의 윤곽을 지워나간 탓에 그의 사진에서 분명한 형상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한 시간 동안 끝없이 형상을 남기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혹은 형상을 만들어가면서 인물은 결국 하나의 유한한 형상으로 귀착된다. 그 과정을 잘게 분할하면 얼마나 많은 형상이 나올 것인가. 그런 까닭에 그의 사진은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형상들이 쌓여 만들어낸 두터운 형상이다.


순간의 미학에 맞서기 위해 작가는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유와 만나면서 자신의 독특한 시간 개념을 발전시켰다. 시간의 속성을 지속으로 본 베르그송은 어쩐지 내키지 않고 그 생각에 맞서 순간 개념을 발전시킨 바슐라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가는 오히려 시간이란 시간의식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순간의 직관에도 지속이 개입한다는 후설의 생각을 선호한다. 순간이란 본래 흐르는 시간과 양립하기 어렵지만 대상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각이 시작하는 순간을 상정해야 한다. 한없이 잘게 분할한 순간들의 집합이 시간이라면 지각이란 앞선 순간과 뒤이은 순간이 연결되는 과정이다. 각 순간마다 연속성이 보존되는 것을 후설은 과거지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하는데 시간 의식은 곧 과거지향 덕분에 지속성을 갖는다. 시간은 시간에 대한 지각과 붙어 다니는 까닭에 순간 역시 지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순간에도 지속이 스며든다. 순간에도 지속이 있다면 순간이란 애초부터 없는 셈이다. 결국 작가에게 순간이란 철학자들이 지어낸 말에 불과하거나 시간을 분석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순간의 미학에 천착해 온 사진가들의 오랜 작업은 풍문에 이끌려 헛것을 찾아다녔던 부질없는 노동이다.


▲Six Days ©
작업이 성숙해 가면서 작가는 이제 시간을 연장시켜 며칠씩 노출을 시도한다. ‘6 Days’ 연작은 제목 그대로 6일간의 노출을 주어 촬영한 인물사진들이다. 6일 내내 꼼짝 않고 카메라 앞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잠깐씩 앉아 있다가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다시 돌아와 몇 분씩 촬영에 임하는 식이다. 촬영하는 동안 모델은 사진가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모델이 없는 동안에도 물론 촬영은 계속된다. 결과물로 나타난 형상은 ‘한 시간’ 연작과 유사하지만 배후에는 큰 차이가 도사리고 있다. 요컨대 ‘6 Days’는 모델을 촬영하면서 동시에 그의 부재도 같이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들은 존재증명이자 동시에 부재증명인 셈이다. 범죄 현장에 없었음을 증명하는 알리바이는 그 곳이 아닌 다른 곳(alibi)에 있었음을 뜻하지 않던가. 존재와 부재를 같은 장소에 모아 놓아둠으로써 작가는 존재의 증명이라는 고전적인 사진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존재와 부재가 엉뚱하게 뒤섞여 있는 이 사진들에서 관객이 보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만을 보고 부재는 보지 못하는 시각의 우둔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사진들이 빚어내는 형상은 유령처럼 녹아내린다. 윤곽이 흘러내리고 형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 형상들에 작가는 에이돌론(Eidolo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헤브라이즘과 섞인 라틴문화는 이 그리스어를 우상(idol)으로 번역했지만 원래 그리스인들에게 그것은 신성을 구현하고 있는 모든 형상, 즉 眞像을 뜻했다. 하기야 그들에게 가짜 신성, 가짜 형상이라는 것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 까닭에 형상은 그들이 보는, 혹은 보려고 하는 대상 자체였으며 우상이란 그들의 경험 속에 둥지 틀 기회조차 없었다. 그리스 정신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개념들을 변질시켜버린 라틴문화에 조소를 보내기라도 하듯 작가는 진짜 형상과 가짜 형상을 자의적으로 나누는 이 오랜 문화적 관성을 비튼다.


형상은 그 자체로서는 본래 아무 것도 아닌 물질 덩어리이다. 사람들이 그의 사진에서 보는 것은 평면 위에 내려앉은 단순한 점, 선, 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의 사진에서 사람을 보며 어떤 인물이 찍혔는지, 여자인지 혹은 남자인지,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를 보려 한다. 불명확한 형체 앞에서도 끝없이 무언가를 보려하는 이 행위 속에 시각의 덫이 숨어있다. 보려 했던 사람은 없고 존재의 자취만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의 사진 앞에서 관객들은 난감할 따름이지만 본래 형상이란 그런 것이다. 배후에 다른 어떠한 것도 은폐하고 있지 않은 형상, 눈에 보이는 모습 자체를 그리스인들은 에이돌론이라 불렀다. 작가는 시각의 그물 사이로 자꾸 빠져나가버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주어진 이 형체가 진정한 형상이라고 말한다.


▲Eidolon ©
전통적인 인물사진은 어느 한 순간 주어진 얼굴 모습을 붙잡아내는 데에 만족해 왔다. 하지만 한 순간의 모습이란 제 아무리 모델의 개성을 정확히 담아낸다 하더라도 잠시 스쳐가는 덧없는 외형일 따름이다. 작가는 그것이 빈껍데기에 불과하며 사람의 진정한 형상이란 오히려 시간의 흐름 속에 묻어있다고 생각한다. 순간을 포획하여 만든 유한한 형상이란 시간의 무한한 중첩이 빚어낸 두터운 형상에 비하면 조잡하다 못해 하찮다. 인물사진의 분명한 형태에 길든 관객들의 시선을 교란시키면서 작가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인물의 형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항의하는 듯하다. 이는 오랜 관습과 경험 탓으로 나태해진 우리의 시선에 가하는 따끔한 일침이기도 하다.

박평종 / 명지대 한국사진사연구소

필자는 파리10대학 철학과에서 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흔적의 미학-기호, 이미지론과 사진의 기초개념’ 등이 있으며 ‘사진의 史的 차원과 美的 차원’ 등의 논문이 있다.


작가 천경우(1969~)는
천경우는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독일 부퍼탈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계속 독일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사진의 가장 지배적인 미학적 요소이자 존재원리처럼 여겨진 ‘순간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해왔다. 1998 독일 Agfa 사진가상을 수상했으며, 2001~2002 독일 니작센주(Delmenhorst) 후원 아티스트, 2001년 한국문예진흥원 개인전시 작가 등으로 선정됐고 국내외에서 7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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