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Hour Portrait © |
이러한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미학자나 비평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천경우는 사진 작업을 통해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근원에서부터 이 오래된 시간 개념에 질문을 던진다. ‘One-Hour Portrait’ 시리즈는 한 시간 동안 미세한 빛이 축적되어 만들어낸 사람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60분의 1초나 125분의 1초라는 스냅사진의 일반적인 노출시간에 비하면 한 시간이라는 노출은 그야말로 영겁에 가깝다. 이러한 장시간의 노출이 새롭지는 않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니에프스의 작품은 8시간의 노출 끝에 얻은 이미지였고 최초의 사진술이었던 다게르의 은판사진도 초기에는 1시간 이상의 노출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는 기술적 제약이 야기한 물리적 한계였을 뿐 사진의 의미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한 시간 동안 얼굴에 쏟아지는 빛이 차곡차곡 쌓여 빚어낸 천경우의 사진에서는 빛의 중량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한 시간의 촬영을 견뎌내기에 가장 편한 자세인 무표정 때문에 인물의 개성을 찾아보기란 어렵지만 정작 작가에게 촬영 대상은 별 의미가 없다. 그의 사진이 주는 무겁고 두터운 느낌은 촬영 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에서 온다. 쉼 없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피사체가 얼굴의 윤곽을 지워나간 탓에 그의 사진에서 분명한 형상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한 시간 동안 끝없이 형상을 남기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혹은 형상을 만들어가면서 인물은 결국 하나의 유한한 형상으로 귀착된다. 그 과정을 잘게 분할하면 얼마나 많은 형상이 나올 것인가. 그런 까닭에 그의 사진은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형상들이 쌓여 만들어낸 두터운 형상이다.
순간의 미학에 맞서기 위해 작가는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유와 만나면서 자신의 독특한 시간 개념을 발전시켰다. 시간의 속성을 지속으로 본 베르그송은 어쩐지 내키지 않고 그 생각에 맞서 순간 개념을 발전시킨 바슐라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가는 오히려 시간이란 시간의식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순간의 직관에도 지속이 개입한다는 후설의 생각을 선호한다. 순간이란 본래 흐르는 시간과 양립하기 어렵지만 대상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각이 시작하는 순간을 상정해야 한다. 한없이 잘게 분할한 순간들의 집합이 시간이라면 지각이란 앞선 순간과 뒤이은 순간이 연결되는 과정이다. 각 순간마다 연속성이 보존되는 것을 후설은 과거지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하는데 시간 의식은 곧 과거지향 덕분에 지속성을 갖는다. 시간은 시간에 대한 지각과 붙어 다니는 까닭에 순간 역시 지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순간에도 지속이 스며든다. 순간에도 지속이 있다면 순간이란 애초부터 없는 셈이다. 결국 작가에게 순간이란 철학자들이 지어낸 말에 불과하거나 시간을 분석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순간의 미학에 천착해 온 사진가들의 오랜 작업은 풍문에 이끌려 헛것을 찾아다녔던 부질없는 노동이다.
▲Six Days © |
형상은 그 자체로서는 본래 아무 것도 아닌 물질 덩어리이다. 사람들이 그의 사진에서 보는 것은 평면 위에 내려앉은 단순한 점, 선, 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의 사진에서 사람을 보며 어떤 인물이 찍혔는지, 여자인지 혹은 남자인지,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를 보려 한다. 불명확한 형체 앞에서도 끝없이 무언가를 보려하는 이 행위 속에 시각의 덫이 숨어있다. 보려 했던 사람은 없고 존재의 자취만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의 사진 앞에서 관객들은 난감할 따름이지만 본래 형상이란 그런 것이다. 배후에 다른 어떠한 것도 은폐하고 있지 않은 형상, 눈에 보이는 모습 자체를 그리스인들은 에이돌론이라 불렀다. 작가는 시각의 그물 사이로 자꾸 빠져나가버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주어진 이 형체가 진정한 형상이라고 말한다.
▲Eidolon © |
박평종 / 명지대 한국사진사연구소
필자는 파리10대학 철학과에서 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흔적의 미학-기호, 이미지론과 사진의 기초개념’ 등이 있으며 ‘사진의 史的 차원과 美的 차원’ 등의 논문이 있다.
작가 천경우(1969~)는
천경우는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독일 부퍼탈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계속 독일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사진의 가장 지배적인 미학적 요소이자 존재원리처럼 여겨진 ‘순간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해왔다. 1998 독일 Agfa 사진가상을 수상했으며, 2001~2002 독일 니작센주(Delmenhorst) 후원 아티스트, 2001년 한국문예진흥원 개인전시 작가 등으로 선정됐고 국내외에서 7번의 개인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