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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적.기계적 자기반성은 진실할 수 없다"
"관성적.기계적 자기반성은 진실할 수 없다"
  • 설동훈 전북대
  • 승인 2006.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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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의 하인스 워드 신드롬 평가

미국의 풋볼 영웅 하인스 워드가 그의 어머니 김영희 씨와 함께 "단일민족사회"인 한국을 다녀갔다. 국내 언론은 그의 방한 일정을 시시각각으로 보도하였고, 많은 한국인들은 그의 성공 이야기를 들으며 더불어 즐거워하였고, 그가 한국인과 핏줄을 나눈 형제임을 자랑스러워하였다. 더구나 하인스 워드가 보인 솔직한 자기고백과 겸손한 자세는 많은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내 신문과 방송에서는 혼혈인에 대해 가해온 각종 차별과 편견 및 고정관념에 대한 반성을 담은 각종 기사와 사설을 앞 다투어 쏟아내었다. 하인스 워드가 같은 성공한 '한국계-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한인(韓人)이라는 우리 민족공동체에 포함시키기 위한 일종의 푸닥거리였다. 순혈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우리 민족일 수 없는 그를 우리민족의 범주 속으로 넣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통과의례였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가 한국을 다녀간 지 한 달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그 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뉴스거리가 사라지자 신문·방송은 마치 올림픽 종료 후 속보가 끊긴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자기반성은 그의 방문기간 동안 한두 차례 있었을 뿐, 그 흔한 캠페인성 장기 탐사 보도를 기획하여 국민의 인식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매체를 찾기는 쉽지 않다. 정부가 4월 26일 발표한 혼혈인 및 이주자 사회통합 방안을 보도한 신문과 방송의 기사 내용과 분량을 보면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책에 대한 평가는 거의 없이, 단순히 짧게 보도하고 있을 뿐이다. 국내 언론의 관심은 하인스 워드에 있었지, 결코 국내 혼혈인에 있지 않았다는 씁쓸한 느낌을 지우기 쉽지 않다.


국내에서 생활하는 혼혈인들은 전 생애 생활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차별대우를 경험하고 있고, 그에 대해 참고 견디거나 무시하는 식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국내 최하위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하인스 워드가 한국에서 성장하였다면, 오늘날은 그와 같은 지위를 결코 가질 수 없었다는 평가가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혼혈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없애려는 과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혼혈인이 겪고 있는 문제는 한국인 일반의 마음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니 만큼, 시민사회에서부터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는데, 언론이 그러한 일을 선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혼혈인 차별의 근저에는 네 가지 핵심 쟁점이 있다. 첫째, 혼혈인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혼혈이 일본의 조직 폭력배들이 손가락을 칼로 긁어 서로 맞닿게 해 피를 섞는 '유비기리'(指切り)를 뜻하는 게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부모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으므로 모든 인간은 혼혈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뿐 아니라 일본어·중국어에도 혼혈이라는 단어가 있으므로, 혼혈은 각 사회에서 나름의 실제적 의미를 지니는 게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 기준선은 애매하여, 대체로 인종·종족·민족·국적이 다른 사람들의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 각각의 기준집단에 따라서 혼혈인의 포괄범위가 달라진다. 예컨대, 인종을 기준으로 삼았을 경우 몽골·중국·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혼혈인이 아니다. 그렇지만 국적을 기준으로 삼았을 경우 조선족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엄연히 혼혈인이다. 그들은 '결혼이민자의 자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국민과 민족에 대한 혼동이 존재한다. 국내 언론들은 대부분 하인스 워드가 자신이 '코리언'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는 자기 고백을 '한국인'으로 번역하여 보도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국적은 엄연히 미국이고, 단지 한국 혈통만을 갖고 있으므로 그 번역어는 한인이 되어야 마땅하다. 정치적 공동체의 성원자격인 '국민'과 혈통적·문화적 공동체의 성원자격인 '민족'(겨레)은 별개의 개념이다.


셋째, 혈통의 민족개념과 순혈주의의 관계를 구명하려는 작업도 중요하다.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체류관리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에서는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도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대한민국정부 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동포를 포함한다)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중 대통령령이 정하는 자"를 한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재외동포재단법에서는 그 범위를 넓게 잡아 "국적을 불문하고 한민족의 혈통을 지닌 자로서 외국에서 거주·생활하는 자"를 모두 재외동포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법률적 규정에 의하면, 하인스 워드와 같은 '한국계-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당연히 우리민족이다. 그렇지만 순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혼혈인은 우리민족이 아니라고 본다. '일반 한국인'과 생김새가 뚜렷이 차이가 나는 그들은 한인이 아니라 이민족이라는 것이다. 혼혈인이 한국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들을 우리민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을 직시하여야 한다.


넷째, 민족주의에 대한 의미부여다. 필자는 민족주의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긍정적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남북이 분단되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서 타민족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차별·배제의 논리로 이어지는 것을 종종 본다.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해 가해지는 차별대우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혼혈인에 대한 차별은 흔히 인종주의로 해석되지만, 그들을 우리민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혈주의에 기반을 둔 배타적 민족주의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다.


요컨대, 국내 언론을 휘어잡았던 하인스 워드 신드롬은 전지구화 시대 한국인이 겪고 있는 국민·민족·민족주의 개념의 혼동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개념 정립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관성적이고 기계적인 자기반성은 진실성을 담보하기 힘들다.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에 대한 유사한 자기반성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엇비슷한 내용의 반성문을 여러 장 쓰는 것과 같은 타성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혼혈인'이라고 호명함으로써 그들집단을 우리집단과 구분되는 타자로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는 한, 그 지시어를 '다문화인'이나 '온누리안' 등으로 바꾸어도 그들에 대한 차별문제는 결코 쉽사리 해결되기 힘들 것이다.


설동훈(전북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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