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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더 큰 감정으로 다스려야"
"감정은 더 큰 감정으로 다스려야"
  • 박원재 국학진흥원
  • 승인 2006.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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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 '의식과 자유 ― 마음의 사회와 자유주의의 피안'(서울: 동녘, 1998)

동양철학 전공자에게는 과학에 대한 일종의 선천적인(?) 콤플렉스가 있다. 그것은 ‘철학=논증의 학문’이라는, 부단히 세뇌되어 온 오래된 학습의 후유증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객관성인 논증을 모토로 하는 과학 앞에 서면 주눅이 들지 않을 요량이 없다. 동양철학이 생래적으로 ‘논증’에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마음의 학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앞의 콤플렉스는 결국 ‘마음의 학문’을 ‘논증의 학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오는 셈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과학적 성과들을 응용하여 동양철학적인 테마들을 풀어나가는 책을 접하면 반갑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반가움을 안긴 저술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의 주제는 한 마디로 ‘마음’에 대한 통찰을 통한 자유주의의 비판과 그 피안에 대한 탐색이다. 저자는 생리학과 인지과학 등의 연구성과를 동원하여 마음의 본모습을 조명해낸다. 생소한 용어들이 난무하기는 하지만, 그 핵심은 자아란 문제처리 시스템인 ‘무의식’과 그것들이 경쟁하는 중앙 무대인 ‘의식’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기체 자체에 가해지는 부담을 감찰함으로써 체계의 안전성을 확보해 나가는 기구인 ‘감정’ 등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감정의 역할이다. 유기체의 안위를 체크하는 감찰자로서의 감정은 외부의 도전에 대한 대처 과정에서 자아가 출구를 찾아내지 못하면 의식을 에워싸고 있는 무의식이라는 저변을 보호함으로써 현상유지를 도모한다. 반면에 자아가 출구를 찾아낸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시스템의 유연성을 입증해 보인다면, 감정은 그것을 쾌감과 희열로 받아들이고 지지한다. 저자가 볼 때, 이성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이렇듯 감정의 감찰활동이 선택지를 결정적으로 좁혀 놓은 다음이다. 요컨대, 감정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이성은 아예 기능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말하는 ‘합리적 자율성’은 이성의 활동을 가능케 하는 전제로서의 감성의 그와 같은 기능을 철저히 은폐시킨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자아가 제어하기 어려운 정념의 체계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인간 존재의 원초성을 구성하는 제어하기 어려운 파토스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우선적으로 진정시키기 위해 쫓기듯 절박하게 내린 처방이 아니라면, 절대군주를 옹호한 홉스나 소유를 미화한 로크나 최소 수혜자에게 거부권을 부여한 롤즈의 작업은 다르게 이해할 방도가 없는, ‘가혹하거나’ ‘천박하거나’ ‘경직된’ 처방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들을 통해 저자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감정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더 큰 감정을 통해서만 제어될 수 있다는 스피노자적인 명제이다. 자유주의는 바로 이런 점에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피안의 거주자들은 스피노자와 니이체와 들뢰즈 그리고 제3비판서의 저자로서 칸트이다. 반면에 저자는 유감스럽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동양의 사상가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스피노자와 니이체와 들뢰즈 대신에 불교와 도가와 유가의 그림자를 본다. 이것이 독서의 또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우연찮게 한 봉우리에 올랐다가 생각지도 않게 구름이 걷힌 건너 편 봉우리의 비경을 보게 될 때의 즐거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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