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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좀 만들어 제끼고, 그만 좀 날아다니시죠"
"그만 좀 만들어 제끼고, 그만 좀 날아다니시죠"
  • 심상용 동덕여대
  • 승인 2006.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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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비엔날레의 시간과 담론 그리고 검열

비엔날레는 전 세계를 그토록 빨리 이동하게 하는 문명, 곧 속도의 산물 중 하나다. 대량의 사람과 물량과 노동을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규합시키는 속도가 아니었다면,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비엔날레의 존재기반은 그러므로 자명하다. 점점 더 즉석에서 만들어재끼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허술한 결과물들, 제트기를 타고 쒝쒝 날라 다니는 문화기획자들과 큐레이터들, 철새처럼 날짜분계선을 넘나드는 관광객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문화의 철새들, 생기발랄한 예술의 숙주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들을 매개하고 이식시킨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들간의 인위적인 조정이 촉진되고, 시간의 억압과 종속 기제가 작동하게 된다. 보통 제트기를 타고 공수된 시간이 지역의 시간을 압박하고 몰아내는데, 이는 물리적으로 당연한 이치다(속도는 그 자체로 에너지다). 재빠르게 날아 온 것에 정지해 있는 것이 대항하기는 어렵다.

비엔날레는 자체적으로 형성돼온 지역의 느리게 흐르는 시간에 고도로 빠른 시간을 유입시킴으로써 정복자의 시간을 실현하는 중대한 형식이다. 이 때, 지역 고유의 시간은 ‘정체되거나 퇴행적인’ 것으로 재규정되고 교정을 강요받게 된다. 비엔날레는 속도의 시대 예술의 사원, 곧 현대판 테메도스다. 몹시 바쁜 척하는 2년 주기의 분주함, 그리고 템포가 더 빠르고, 파격적이고 이질적인 시간의 개입을 통해 지역과 공간과 전통적의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원, 이 종교에서 핵심 교리다. 흥미로운 건 현대의 국제비엔날레들이 미술의 시간을 정복해가는 경로가 한 세기 전 서구 제국주의의 확산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가령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를 오크 위 앤위조 같은 인물이 디렉팅하게 됐을 때 명백하게 드러났다. 오크 위 앤위조, 뉴욕에서 살고 있는 나이제리아 출신의 비평가며, 시카고의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의 큐레이터이고, 글로벌화된 미국적 다문화주의의 정신적 세례의 한 중심에 성장한 그의 큐레이팅이 어느 정도 남아프리카 사회의 뿌리 깊은 분열의 콘텍스트에 파고들 수 있을까. 그는 거대 독점자본주의에 의해 상품화되어가는 후기식민지주의적 문제들을 짚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결국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가 전근대적인 국경 개념을 넘고, 아프리카 예술에 국한되는 것도 넘어 유럽과 미국을 향해 개방된 비엔날레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고? 그의 정체성을 참조할 때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역의 흑인단체들이 지역적 맥락을 보호하고자 피력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것을 넘어서자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무엇이 다른가? 그는 후한 루 같은 사람들, 하랄트 제만, 르네 블록, 프란체스코 보나미 같은 이른바 ‘비엔날레 꾼’, 또는 ‘제트플라잉 큐레이터들의 동료일 뿐이다. 이것이 저 유명한 신자유주의의 이중성이다. 한편으론 사회복지를 해체함으로써 사회적 공공성을 약화시키면서, 다른 한쪽으론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비엔날레도 마찬가지다. 심각하게 지역의 문제에 개입함으로서, 결과론적으로 그 지역에서 지적, 미학적,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길할 정도의 나긋나긋함, 제트플라잉 큐레이터들의 허구성 짙은 지적 증여에 너무 수월하게 동조적이 되고 마는 태도를 되돌아보는 건 재고의 여지없이 유익하다. 다만, 우리의 시계가 너무 작동불능이 된 것은 아닌지, 지구촌적으로는 다양성의 근간이 이미 너무 심각하게 훼손된 것은 아닌지가 걱정이다.

불투명하고 조정된 담론

비엔날레의 궁극적인 취지나 목적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비엔날레를 기름진 담론 생성의 장’으로 정의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비엔날레가 존재와 문명, 현시대 역사와 사회에 대한 풍성한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과 지식의 이 장밋빛 상호작용의 이면에는 답해야 할 많은 질문들이 가려져 있다. 그 고도로 인위적인 빈도, ‘세계적 수준의 미술축제’에 내재하는 과시적 속성, 비슷한 이름의 다른 전시들과의 불가피한 비교, 문화의 상부시장을 만들어 내야하는 압박 등을 고려할 때, 그것이 걸러내는 관점과 전망은 이미 충분히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담론형성의 초기과정에 이미 어떤 사전적인 욕구와 요구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반 캅스에 의하면, “전시는 필연적으로 무엇을 재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이 재현을 조정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전시의 재현에는 이미 주체의 의도, 인식론, 취향, 경험, 그리고 정치, 사회적 정황들, 주류 미학, 심지어 주식시장의 경향까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엔날레를 투명한 담론의 제조공장으로 정의하는 것엔 어떤 가증한 거짓이 포함돼있다. 비엔날레의 매우 인위적인 작동방식, 선언과 선전, 기업을 모방한 조직기구 등을 볼 때, 그것이 지향하고자 하는 궁극이 무엇인가를 짐작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비엔날레는 시장 및 제도권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긴밀하게 결탁돼있다. 그것의 슬로건들이 거의 언제나 후기시장주의자의 이념을 대변하는 것은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불가피성의 논리, 자의적인 검열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비엔날레의 거짓과 은폐, 조절된 담론은 거의 문제시되지 못한다. 그 선동과 설득의 과정들은 순풍에 돛단 듯 일사천리로 성취된다. 이렇게 되는 이면에는 다른 담론들의 형성과정에 대한 사전적인 봉쇄가 있는데, 그 봉쇄는 다음과 같은 불가피성의 논리’들로 지지된다. 

 1.  “거역할 수 없는 전지구화의 흐름이다.”
 2.  “그렇지 않다면, 시대착오적인 자기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3. (우리 같은) 제3세계가 생존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제 1세계와 관련성을 입증해야 한다. ‘유명세의 영입’이 없으면 승격도 없다.
 4. 과정적 빈곤은 어쩔 수 없다. 등등.

이런 담화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위기의식의 유발과 고취다. 하지만, 이 불가피함의 논리는 거의 전적으로 심리적 압박과 열등, 투사에서 비롯되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계의 지평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각성은 억압이 낳은 사전적 소외에 다름아니다. 즉, 그렇게 우리를 밀어붙이는 주체는 우리 자신뿐인 것이다. 이 외에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적이 없다.

언젠가 재단 측이 밝힌 광주 비엔날레의 취지는 “한국의 문화적 역량을 국제미술계의 시험대에 과감히 올려보는 기회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 문구가 의미하는 바를 환기할 때 실로 마음이 아프다. ‘문화역량’, ‘저울’, ‘국제미술계’ 같은 생경하고 출처가 다양한 용어도 용어려니와, 대체 우리의 미학적 질이 왜 국제미술계의 저울에 달려야 하는가. 더구나 이 터무니없는 계량의 주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국제미술계란 개념은 또 무엇인가. 차라리 뉴욕과 파리-로마-베를린으로 이어지는 기름진 삼각주의 주변국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직할 것이다. ‘국제미술계’ 는 어떤 종류의 지정학적 범주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서구의 비서구 주변국들에서 제한적으로,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규범으로 통용되는 어떤 종속적 차원이 반영된 개념이다. 사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트라우마의 투사가 설정해놓은 가상의 검열체계에 자신의 평가를 의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허구는 우리의 집단적 심리체계 안에서 강력하게 작용한다. 열등과 보상의 집단적 메커니즘은 끝이 없고, 또 간절하다. 또, 국제미술계의 기준에 부합되고자하는 광적인 욕망과 좌절의 가파른 상승이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자의적으로 수행된다. 여기 어디에도 공적인 강요는 없다. 30년 동안 출판되지 못했던 ‘동물농장’서문에서 조지 오웰의 예견은 뼈에 와닿는다 : “영국에서 행해지는 문필검열에 대한 불길한 사실은 그것이 대개 자의적이라는 점이다. 인기없는 사상들은 침묵되고, 불편한 사실들은 어둠 속에 내팽개쳐지므로 공식적으로 금지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에겐 이제 예술과 문화조차도 불가피한 과업의 하부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도 없다는 말인가. 다만 해야만 될 일을 하는 것 외의 다른 어떤 개연성도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인가.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의 지적 열정, 모험을 동반한 탐색으로서의 문화, 예술의 저변이 급속하게 침하되어가는 것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심상용 / 동덕여대·미술사

필자는 파리1대학에서 ‘이미지에 의해 재현된 시간과 공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천재는 죽었다’, ‘현대미술의 욕망과 상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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