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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비평_베스트셀러를 점검한다: (2)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1·2』
기획비평_베스트셀러를 점검한다: (2)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1·2』
  • 최장순 기자
  • 승인 2006.05.02 00:0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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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민족주의 등장과 타이밍 일치…맥락 놓치는 초역사적 서술

박노자는 20~30대 젊은층에 가장 잘 알려진 학자 중의 한명이다.

한겨레의 칼럼 필진으로 활동하며 한국사회의 민족주의, 서열주의 등을 질타해온 그의 칼럼집은 베스트셀러에 등극했으며, 그는 서울과 지방의 주요 대학을 순회하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기에 바쁘다.

이방인이지만 한국인보다 더 한국의 치부를 잘 안다는 그의 인기비결과 혹 있을 지도 모를 거품현상을 함께 짚어봤다.

“질풍노도같은 명쾌한 글솜씨와 함께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하원호 성균관대 교수)
“그의 역사의식은 한국 사람의 평균치보다 더 진보적이다”(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근현대사에 대한 그의 안목은 4차원적 비평을 가능케 한다. 그는 천재다”(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이방인이면서도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을 한국인보다 더 잘 안다”(김수영 한겨레출판사 편집장)

지금까지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이하 박노자)에게 쏟아진 찬사다. 우리 사회에 그동안 이러한 인물이 없었던 것일까. 지식인에 대한 온갖 찬사를 그가 독점해 간 것처럼 보인다.

한국 사회에 대한 여러 점의 초상화와 줄기찬 언론 기고를 통해 ‘죽비소리’를 내온 그가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2권을 펴낸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이 책은 교보문고 ‘사회/정치/법’ 분야에서 4월 3주간 6위(1권은 11위)를 기록했다.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진입시키는 그의 매력은 뭘까.

장은수 도서출판 황금가지 대표는 “신기하고 솔직하기 때문 아니냐”고 되물었다. 한국 지성 사회의 진부한 담론 생산과 가식적인 태도를 꼬집은 말이었을까.

“박노자는 우리 사회의 인맥 관계에 부담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자기 할 말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방관자의 자리에 가 있다. 그래서 제3자의 눈으로 한국사를 볼 수” 있어 그의 글이 솔직하고 도발적일 수 있다는 것. 학연과 지연, 사승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지성사회를 볼 때 그의 지적은 타당하다.

장 대표는 “흔히 외국인들이 보여주는 한국 사회 비판은 ‘한국 사회 참 이상하다’는 식의 체험적 한국론에 그친 반면, 박노자는 한국사에 대한 탄탄한 문헌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어 깊이가 있다”며 박노자 신드롬의 ‘근거’를 제시했다.

백원근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여건들을 모두 고려하다 보면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박노자는 단순한 논리를 구사하여 본질적인 문제를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어 호응이 좋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외부에서 맴도는 비판, 그는 왜 밖에 있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박노자 신드롬은 “그의 민족주의 비판이, 80년대와는 달리 보수화·우경화된 지금의 민족주의 등장과 타이밍이 맞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인이 맨살로 느끼는 역사적 감각을 결여하고 있어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라고 전했다.

장은수 대표는 “박노자처럼 역사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비판하는 것은 쉽다”는 입장이다. “가령 ‘친일파’는 삶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며 “그러한 유보적 태도가 역사에 대한 예의인데 그는 너무 쉽게 단죄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한국의 경제적 상황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빨리빨리’ 문화를 비판하려면 한국의 내부적 구조부터 면밀히 살펴야 하는”데 “박노자는 한국의 ‘최선’의 선택에 대해서 너무 쉽게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박노자가 생각하는 ‘절대선’이 아니면, 상황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최선’일지라도 가차 없이 비판당하고 만다는 지적이다.

역사적 맥락 빠뜨린 포스트모던한 서술

이권우 도서평론가는 “우리는 분단과 독재를 겪으면서 권력의 검열체제를 내면화해왔다”며 “박노자는 우리가 자기 검열을 통해 항상 ‘쉬쉬’해 왔던 것들을 공론화시켰다는 의미에서 신선”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우리 역사 최전선’(푸른역사)에서는 자기만의 원칙으로 우리 역사를 재단하는 느낌이 강했다”며 아쉬움을 토했다.

한국의 근대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세계사적 맥락과 접목시키는 박노자의 글쓰기는 한국 외부에서만 맴돈다는 느낌을 준다. 한 문학 교수는 “파란과 질곡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 역사의 내적 동인을 살피지 않고, 그런 것들의 부작용에만 시선을 돌리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2’의 이번 컨셉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다. 해부대에 올려진 (주)대한민국이 대학과 병영, 기업, 그리고 살갗에 와닿는 일상의 풍경에 근저당을 설정해놓았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진단은 타당하지만, 그 진단과정에 개입되는 인식론과 해법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매매계약에 있어 그가 꼬집고 있는 것은 단연코 ‘폭력’의 코드이고, 궁극적으로 그 비판의 칼날은 이 땅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잘만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향한다. 이번 책 역시 종전까지 박노자 텍스트가 보여준 인식론과 같은 곡률을 이루고 있다.

한국에 이식된 훈육사회의 근본적 폭력성을 참을 수 없던 그는 ‘폭력의 기원’을 찾아 80년대 신군부를 거쳐 박정희 식 개발독재로 옮겨갔다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폭력성에 머물더니, 이내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 결과, “사대부가 노비를 때려죽이더라도 처벌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219쪽) 조선시대의 폭력성과 한국사회의 폭력성을 병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두고 하원호 성균관대 교수(한국근대사)는 ‘초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비판했고, 박노자는 ‘초역사적’ 역사서술에 대한 알리바이로 지금까지 브로델의 ‘장기지속’을 도입해왔다. 이와 관련해 고원 경희대 강사(프랑스사)는 “의식의 장기지속이 성립되려면, 공통되는 물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의 물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비슷한 현상이라 해도 단순 병치시킬 수 없다”고 일축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

이에 대해 박노자는 “한국의 주된 근대적 제도들-학교, 신문, 근대적 스포츠, 경찰 등-은 이미 개화기에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개화기 신문이나 학교에서의 국가주의적 주입의 요소들을 보았을 때, 그 뒤의 비슷한 요소들과 연결시키는 것이 그렇게 무리는 아니다”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하지만, 박노자 식의 계보학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재해석하고 있어 ‘지금 여기에’ 창조적 의미를 던져주지만, 대문자 ‘H’의 역사가 배제하는 다채로운 미시사들에 대한 오밀조밀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아, 물적토대를 벗어난 ‘역사적 오류’가 담겨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박노자에 대한 지지도가 9할을 넘는 고명섭 한겨레 기자도 약점을 발견하고 지적한다.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결벽증에 가까운 순결주의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식의 성급한 견제심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악마의 집단 응원전을 보고 파시즘적 광기를 느꼈다는 박노자의 진술을 염두에 둔 듯하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박노자는 “민족주의는 군사주의와 마찬가지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인 형태이며 내가 그 형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근대적 자본주의의 여러 병폐와 모순점을 이야기하면서 민족주의의 모순점을 이야기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타자의 평가가 객관적이라는 심리는 착각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박노자 신드롬을 두고, “우리 사회가 스스로의 눈으로 자기 모습을 성찰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을 잘 아는 한 이방인이, 한국인이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했기 때문에 관심을 끌었던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는 “나와 다른 부류의 타자로부터 또 다른 객관성이 확보된다고 믿는 심리상태가 존재하는데 그건 엄청난 착각”이라고 전했다.

박노자 신드롬은 스스로를 外化시켜 객관의 광학을 마련하지 못한 우리 지성의 현주소를 방증한다. 외부자의 시선에 의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회자될 수는 없을까.

당신과 우리. 그 사이엔 아직도 너무나 커다란 장벽이 있는 듯하다.

최장순 기자 ch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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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2006-10-14 16:18:11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점점 모순점과 헛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우선은 지나치게 서구중심주의적입니다. 계몽주의 이후의 서구적 가치들을 전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라고 착각하고,그 기준을 가지고 각 지역의 역사와 가치들을 마음대로 재단해버립니다. 물론, 그도 서구를 비판하지만 서구의 행동에 대해서 비판할 뿐, 서구의 가치관(서구적 진보주의)에 대해서는 금과옥조 처럼 떠받들지요. 그의 글들은 충분히 참고할 만하지만, 100%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부 박노자 교수 팬이나 진보주의자들은 박노자를 비판하면 수구나 우파라고 하던데, "박노자 비판 = 수구" 라는 등식이 어째서 성립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무 2006-05-12 18:37:11
왜 이 기사는 필요 이상으로 박노자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강조할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태생 한국인이다.) 그냥 그가 제시하는 논거를 논거로 보고 거기에 대해 비판하지 못하고 외국인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일까? 초역사화 한다는 비판은 외국인의 저술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저술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인데, 왜 곧 그것이 그가 러시아 태생이기 때문에 거의 피할 수 없는 한계인 것처럼 글을 쓰는 것일까? 이 기사의 이런 경향, 이 기사에 인용된 박노자에 대한 논평들에 나타난 이런 경향은 박노자가 그렇게 비판하는 민족주의와 관련이 없을까? 유럽에서 이렇게 글을 썼다면 이런 기사는 인종주의의 의혹을 받을 것이다.

지나다 2006-05-06 19:53:29
박노자씨의 비판에 대해 전부 아니면 전무란 식으로 여기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외부인의 시선에 대해 열려 있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략 학계 내지 주변 학인들의 반응은 왜 애정없는 비판을 하느냐인데, 왜 애정이란 여지를 깔고 비판의 가파름을 포기해야 하는지요? 박노자씨는 한국인으로 귀화했으나 속속들이 한국인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의 능력이 허용하는 한, 내부의 외부자(비판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직시하기에 굳이 "당신들의"란 표현을 채택했다고 읽으면 안 될까요? 차마 "우리들의"이라고 쓸 수 없는 자의식과 거리두기 말입니다.
그렇지만, 박노자씨의 이런 태도는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모범으로 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인들이 자신의 분야와 더불어 자신의 현실(한국 사회)을 벗어날 수 없겠지만, 아시다시피 학인의 처함은 근본적으로 외부자의 위치에 서지 않으면 학문적인 객관성을 담보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내용적 엄밀함의 문제 이전에 학자적 태도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든 분위기가 아닌가 씁쓸하네요.

김현경 2006-05-03 01:27:13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위에 나온, 조선시대에 사대부가 노비를 때려 죽여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노비를 때려 죽였다가 집안이 풍비박산 난 사례도 있습니다. 주인은 노비의 노동력에 대해서만 권리를 가졌을 뿐, 생명을 좌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법치국가라, 살인을 저지르면 양반이어도 당연히 처벌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06-05-03 01:06:08
박노자의 책 뿐만이 아니라
맞아죽을 각오로 썼다는
일본인의 책이나

아무튼 외국인의 책이 많이 팔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문제를 짚어내고 해결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우리의 학자들이 외국의 신문에 외국에 대해
그렇게 비판의 메스를 들이댈 수 있냐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박노자는 3자라는 이유가
보호를 받으면서 열심히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는 4대 의무도 없으니
책임을 질 이유가 없으니깐요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겠어요

2인칭의 '당신들'이라는 제목이
한국인의 손에 쥐어지고 있다니 참담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