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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총장의 본질은 ‘거지’다
대학 총장의 본질은 ‘거지’다
  • 김종영
  • 승인 2022.11.02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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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주먹③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현대국가는 지식국가이다. 지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대학에서 나온다. 그런데, 대학과 학문이 붕괴되고 있다. 한국만큼 대학에 투자하지 않는 국가도 없다. 대학과 학문, 교육에 대한 비판적이고 통찰력 있는 분석이 필요한 때다. 최근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쓰고, ‘지식과 권력’ 3부작을 내놓았던 김종영 경희대 교수(사회학과)가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나섰다. 학문과 정책(정치)의 연결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대학 총장들은 용산과 여의도에 가서 한국 대학이 한국 경제를 견인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이루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수 있다는 비전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학 총장이 ‘비전을 보여주는 거지’가 되어야 한국 대학이 산다. 

“미국 거지(American beggar)를 보십시오! 그는 영어는 잘하지만 논문은 못 씁니다.” 한국인 교수의 이 말에 국제학술대회 참가자 전원이 빵 터졌다. 아시아 대학들의 발전을 논하는 학술대회 참가자 대부분은 아시아 각국의 대학정책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대학교육과 연구에서 영어의 중요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한국 교수의 ‘미국 거지’ 발언은 국제학술대회를 웃음바다로 만들었고 모두에게 좋은 추억을 남겼다. 많은 학술대회에 참가해 봤지만 내 평생 이만큼 좌중을 폭소케 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기억 탓에 ‘beggar’(거지)라는 단어는 나의 웃음보를 자극한다.  

존 텔린(John Thelin) 교수는 미국대학사 분야의 권위자다. 그가 쓴 『미국대학사』(A History of American Higher Education)는 대학연구에 관한 출판으로 유명한 존스 홉킨스 대학 출판사에서 3판까지 나온 명저다. 500쪽이 넘는 존 텔린의 『미국대학사』는 대학정책과 대학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따분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매우 심각하게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의 어떤 부분을 읽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포복절도했다. 존 텔린에 의하면 대학 총장의 본질은 ‘거지’(beggar)라는 것이다. 우리 세속사회에서 가장 고상하고 존경받는 대학 총장을 ‘거지’라고 하니 배꼽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나 제시할 수 없는 이 놀라운 통찰력에 나는 왜 이 책이 명저인지 깨달았다. 

대학 총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1636년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가 세워졌다. 하버드 대학은 초기 돈이 없어 생존을 위해 총장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기부를 요청했다. 존 하버드 목사가 죽고 그의 유산이 하버드에 기부되었는데 이를 높이 기리기 위해 대학 이름을 하버드로 정했다.

코네티컷의 한 대학은 당시 영국 거부 엘리후 예일의 기부를 기리기 위해 대학 이름을 ‘예일’로 바꾸었다. 예일대는 엘리후 예일이 유산의 일부를 예일대에 남길 줄 기대했는데 그의 유서에 그런 말이 없어 크게 실망했다.

미국 대학들은 초기부터 대부분 재정난으로 허덕였고 총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돈을 구걸하러 다니는 것(기부 요청)이었다. 하버드를 지역대학에서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시킨 하버드 최장수 총장 찰스 엘리어트는 ‘거지 중의 거지’였다. 그의 40년(1869~1909) 재임 기간 동안 하버드 기부금은 무려 300배나 증가했다. 당신의 대학을 명문대로 성장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엘리어트와 같은 ‘거지왕’을 총장으로 모셔오면 된다.     

존 텔린은 21세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부자 대학인 미국 대학의 총장들이 여전히 돈을 구걸하러 다닌다는 점에서 대학 총장의 본질(거지)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 프린스턴대 설립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명문대 총장들이 초대되었다.

미국 최고 대학 총장들이 모인 저녁 만찬에서 프랭크 로즈 코넬대 총장은 “우리는 큰 집에 사는 거지다”라고 말해 만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수십 조원의 기금을 가지고 있는 미국 대학의 총장들도 세계 최고의 연구와 교육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구걸하러 다니는 일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여긴다. 

윤석열 정부는 3조 6천억원 정도를 증액해 대학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한국대학이 질적으로 향상되고 4차 산업혁명의 비전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적은 액수다. 이 돈은 미국 연구중심대학 하나의 1년 예산에 해당된다. 사진은 2022년 대교협 하계 대학총장 세미나 모습이다. 사진=강일구 기자 

‘비전을 보여주는 거지’

“대학 총장이 너무 돈만 밝히는 것이 아닌가?” <조선일보> 기자가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광형 총장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총장 중 한 분으로 취임할 때 임기 동안 하루 1억 원을 모금해 오겠다고 선언한 괴짜 총장이다. 이 총장이 취임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의 기부금 액수는 무려 1천76억 원이었다.

이 총장은 “무식하게 선언하니 이뤄지더라”라고 말했다. 기자가 “돈을 잘 벌어오는 비결은 뭔가?”라고 물었고 이 총장은 “중요한 건 비전이다”라고 답했다. 미국 대학 총장들도 대놓고 기부금을 내라고 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들은 ‘비전’을 보여준다.

즉 대학 총장과 일반 거지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가 ‘비전을 보여주는 거지’라는 점이다. 이광형 총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카이스트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는 내친김에 의학전문대학원과 미국에 카이스트 해외 캠퍼스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서 존 텔린이 말한 대학 총장의 본질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이광형 총장이다. 

‘거지 중의 거지’ 하버드·프린스턴대 총장

윤석열 정부가 대학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3조 6천억 원 정도를 증액해 대학에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3조 6천억 원은 한국대학이 질적으로 향상되고 4차 산업혁명의 비전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적은 액수다. 이 돈은 미국 연구중심대학 하나의 1년 예산에 해당된다. 이 적디 적은 예산으로 어떻게 반도체에 목숨을 걸고 지방대 시대를 열고 4차 산업혁명에 매진할 수 있을까?

한국 대학 총장들은 정부에 최소 10조 원 이상을 요구해야 한다. 요즘 한국 대학 총장들을 지켜보면 몹시 답답하다. 대학들이 죽고 있는데 우는 소리만 한다. 울어서 투자받기로 약속받은 돈이 고작 3조 6천억 원이다. 

한국 대학들이 살기 위해 총장들은 이제 품위를 내팽개치고 대학 밖으로 나가서 정치의 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광형 총장은 카이스트에 3일만 출근하는데 왜냐하면 “여기 있어봤자 돈 하나도 안 벌린다”는 사실을 몸소 체득했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 총장들은 대학에 출근할 필요가 없다. 곧 사라질텐데 출근하면 무엇하겠는가. 대학에 출근하지 말고 용산 대통령실과 여의도 국회에서 살아야 한다.

하버드 총장과 프린스턴 총장도 ‘거지 중의 거지’라는 사실을 한국 총장들도 깨달을 때가 되었다. 대학 총장들은 용산과 여의도에 가서 한국 대학이 한국 경제를 견인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이루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수 있다는 비전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학 총장이 ‘비전을 보여주는 거지’가 되어야 한국 대학이 산다.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교육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사회적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최근 출판했다. 지식과 권력 3부작인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지민의 탄생: 지식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지성의 도전』, 『하이브리드 한의학: 근대, 권력, 창조』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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