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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기억, 또 다른 全體主義”
“문화적 기억, 또 다른 全體主義”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4.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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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논문 : 김학이 동아대 교수의 ‘얀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

▲Jan Assmann ©www.uni-heidelberg.de
전세계적으로 ‘기억 연구’가 대유행이다. 각종 프로젝트와 토론회로 바쁜 한국은 물론, 하르트무트 뵈메 베를린대 교수 같은 이는 문화학의 6대 주제 중의 하나로 기억을 꼽는다. 그는 호들갑스럽게 “문화적 기억을 지향함으로써 정신과학은 그 동안 잃어버렸던 학문의 수석지위를 문화학의 형태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 국내 역사학자가 이런 ‘잘나가는’ 기억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비판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끈다. 김학이 동아대 교수가 발표한 ‘얀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서양사연구 33집)이 그것이다. 그는 먼저 왜 기억이 유행인지 정리한 다음, 곧바로 비판에 나선다.

기억의 유행은 구조주의 역사학이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구조란 당대인에게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사후적으로 비로소 파악될 수 있는 과정 및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생생한 체험으로서의 과거는 역사라기보다 기억의 문제다. 그 다음은 정체성의 위기다. 지난 2백년간 근대적 정체성의 내용을 형성했던 민족국가의 의미가 흔들리면서, 대항지구화가 생겨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기억에 집착하는 현상도 생겨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짐작되는 것으로 주제의 친근성을 든다. 기억연구는 이론적 천착도, 정밀한 사료 작업도 불필요해 보이며 기념비 설립 시기와 분포를 개관하거나, 노인들의 경험담만 모아도 과거의 상이 쉽사리 그려질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있다고 말한다. 기억에 관한 경험적 연구는 많지만, 이론적 천착은 거의 없다는 게 그 증거다. 기억연구가 약간은 안이한 방식의 연구라는 지적인 셈이다.

그러나 김 교수가 볼 때 기억을 이론으로 정립시켰다고 하는 모리스 알브박스, 얀 아스만(위 사진) 등의 독일학자들이야말로 진짜 문제다. 알브박스는 그의 스승인 베르그송의 기억이론을 “너무 주관적”이라고 거부하고 사회적 기억, 집단기억만이 가치있다고 본 사람이다. 가령 프로이트의 의식과 무의식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그에겐 뜬구름잡기인 셈. 이는 야스만에게까지 이어진다.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이라는 개념은 알브박스의 사회적 기억을 문화론으로 재서술한 것으로서, 문화적 기억만이 전체주의화 하는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고 본다.

아스만에게 문화적 기억은 의미로 충만한 공간이지만 그에 비해 천편일률적인 일상은 망각의 세계요, 전체주의의 토양이다. 김 교수는 이 관계를 역전시켜 아스만을 물구나무 세운다. 즉, 문화적 기억이 오히려 전체주의적이라는 것. 그리고 일상은 문화 엘리트들에게 맨날 두들겨맞는 식민화의 공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문화적 기억이 전체주의인가. 김 교수는 먼저 “전체주의가 망각과 결탁한다”는 아스만의 생각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히틀러 시대를 전공한 학자답게 김 교수는 나치즘의 기억정치를 예시한다. 전체주의는 기억을 없애는 게 아니라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스마르크가 히틀러로 연결되는” 식의 특정한 종류의 기억을 정립하며, 굳이 표현하자면 “차가운 기억”이다. 더 극적으로 말하자면, 전체주의는 신화적 기원을 혁명적 현재에서 비로소 실현시키려는 종말론적인 ‘신화동역학’이 체제로 되어버린 사회다. 김 교수가 볼 때 문화적 기억을 강조하는 아스만의 사회가 꼭 이와 닮았다. “한번 구성된 뒤 시간의 흐름에 문을 닫아 걸고 절대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을 집단으로 통합시키는 ‘접착제’이며, 기억의 한쪽을 배제함으로써 기억들 사이의 갈등을 시야에서 놓쳐버린다.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은 그토록 닫혀있는 것이기에 일상과 ‘등돌리는’ 것으로 만들어져가고 급기야 일상 위에 군림하는 문화적 주인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김 교수는 결론짓는다.

김 교수는 아스만 류의 문화론을 넘어 기억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프루스트가 탁월하게 재현한 베르그송의 ‘지속되는 기억’을 불러들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과자 향기를 맡았을 때 그 향기는 코보다는 머리를 자극한다. 前의식으로 물러나 있던 과거의 시공간이 눈앞으로 엄청난 속도로 확장된다. 김 교수는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 촉발되는 이런 기억이야말로 공고한 “자아의 거죽”을 뚫고 나와 우리를 낯설게 한다고 강조한다. ‘마뉴먼트(상징적으로 질서화된 기억)’가 고집스럽게 늘어선 것은 분명 현대사회의 문화적 특징이긴 하지만, 그것이 결코 자아해방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단호한 메시지가 인상깊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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