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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철학의 정수…생각의 ‘향연·곡예’를 만나다
하이데거 철학의 정수…생각의 ‘향연·곡예’를 만나다
  • 한충수
  • 승인 2022.10.28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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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예술 작품의 샘』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 한충수 옮김 | 이학사 | 214쪽

예술 작가·작품은 모두 ‘예술’에서 샘솟는다
예술은 영원한 수수께끼…신비로운 예술철학

하이데거는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서양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룹니다. 20세기에 활동한 독일과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들 가운데 하이데거의 철학을 연구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입니다. 또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1927)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BC 370),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1889)과 함께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우수한 책으로 손꼽힙니다.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독일 마르부르크대, 프라이부르크대 교수를 지냈다. 현상학, 해석학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진=위키백과

1930년대 초반부터 하이데거는 예술에 관한 철학적 숙고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숙고의 산물은 1935년 독일 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 강연 「예술 작품의 샘에 대하여」를 통해서 처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이 강연의 내용을 대폭 수정 및 보완하였고, 제목도 「예술 작품의 샘」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강연은 총 3부로 이루어졌고, 1936년 독일 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삼 주에 걸쳐 발표되었습니다. 이때의 발표문은 1950년 논문집 숲길에 포함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예술 작품의 샘」은 당시 철학계에 돌풍을 일으켰고 1960년 레클람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습니다. 그 바람은 여전히 잦아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술 작품의 샘」은 2012년 클로스터만 출판사에서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바로 이 책을 저는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주목받아 온 「예술 작품의 샘」은 이미 한국에서 세 차례 번역되었습니다. 저의 번역은 기존 번역들이 없었다면 나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번역의 선배님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습니다. 「예술 작품의 샘」을 읽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 글은 예술 작품의 샘에 관한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작품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그 샘[근원]은 작가입니다. 하지만 작품을 창작하지 않고 작가가 될 수는 없기에 작가의 근원은 작품입니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가와 예술 작품이 모두 예술에서 샘솟는다고 말하며 이제 예술의 본질[본재(本在)]에 관해 묻습니다. 그런데 예술은 작품 속에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모든 작품은 사물다운 측면을 가지기에, 그의 물음은 사물의 본재를 향합니다. 그는 사물의 본재에 대한 세 가지 전통 규정을 검토하고, 그중에 형태를 갖춘 재료라는 규정에 주목합니다. 이 규정은 도구의 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물로부터 만들어졌으나 단순한 사물은 아니고 그렇다고 작품도 아닌 도구는 사물과 작품의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도구가 사물과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므로 하이데거는 도구의 본재에 관해 묻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 본재는 철학이 아니라 예술에 힘입어서, 즉 반 고흐의 그림을 통해서 설명됩니다. 하이데거는 흥미롭게도 그 설명 과정에서 작품의 본재, 즉 작품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바가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 본재는 작품 속에서 진실의 벌어짐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예술의 본재를 “존재자의 진실의 스스로를-작품-속에-작동하게-놓음”으로 규정합니다.

 

이상은 「예술 작품의 샘」의 제1부를 요약한 것입니다. 요약 안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들이 현기증을 일으킬 것입니다. 게다가 그 수많은 물음에 답이 금방금방 뒤따르지도 않습니다. 가령 예술의 본재에 대한 물음은 초반에 제기되고 그 답은 나중에 예기치 않게 주어집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술 작품의 샘」이 읽기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데거는 이 글에서 생각의 향연이 벌어진다고 말하는데, 저는 생각의 곡예가 펼쳐진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재주를 뽐내려고 일부러 어지럽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그저 생각의 사태, 즉 예술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차근차근 진행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술이 영원한 수수께끼이기에 그의 예술 철학도 신비롭게 표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술 작품의 샘」을 독해하려면 하이데거의 곡예와도 같은 생각의 작업을 배우고 그 작업에 친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익숙해지고 나면 까다로워 보였던 그의 생각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난해한 사상가라는 누명을 벗는 데 저의 번역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는 예술의 본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규정, 즉 “존재자의 진실의 스스로를-작품-속에-작동하게-놓음”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존재자의 진실은 그 존재자의 참된 존재를 말합니다. 하이데거가 「예술 작품의 샘」에서 예로 든 신발이라는 존재자의 경우에 그 진실은 신발이 신뢰의 정(情)을 듬뿍 받으며 존재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진실은 평소에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발을 보호하거나 장식하기 위해 신발을 이용할 뿐이지 신발에 신뢰의 정을 쏟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가령 반 고흐가 그린 「신발 한 켤레」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 신발의 참된 존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은 존재자의 진실이 스스로를 작품 속에 놓고 작품 속에서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 “스스로”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예술에서 작가보다 진실이 더 근본적이라는 하이데거의 예술관을 나타냅니다.

저의 설명이 너무 추상적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구체적인 예를 가지고 부연해 보겠습니다. 흙을 빚어서 만든 그릇이라는 존재자를 떠올려 봅시다. 그릇의 진실, 즉 그 참된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 진실은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제기에서 드러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통 그릇에 놓인 음식이 사람들에 의해 실제로 섭취되는 것과 달리 제기 위에 올려진 음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한 존재자에게 바쳐집니다. 그러니까 같은 음식도 제기에 담기면 거룩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그릇이라는 존재자의 진실은 거기에 담긴 것을 성스럽게 만들며 존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화(聖化)하는 존재는 그릇이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릇을 성스러움과 관련짓기보다는 먹을거리를 담는 도구로만 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그들이 그릇의 참된 존재를 뚜렷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줄 수 있습니다.

예술 도자기를 사례로 들어보겠습니다. 독일 도시 에센에는 도자기 공방 마르가레텐회에(Keramische Werkstatt Margaretenhöhe)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우하우스(Bauhaus)의 이념에 따라 아름다운 생활 도자기가 빚어집니다. 공방을 대표하는 도예가 이영재(Young-Jae LEE)는 예술 도자기를 만들어 자신의 예술관을 펼치며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2000년 어느 날 이영재는 독일 도시 쾰른의 성 베드로(Sankt Peter) 성당으로부터 성찬식 때 사용할 잔을 빚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부탁은 도예가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원래 성배는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지고 긴 다리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흙으로 빚을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잔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담는 성스러운 용도로 쓰일 것이었습니다. 이영재는 그녀가 어린 시절 할머니가 정화수를 한 사발 떠 놓고 기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흙을 빚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도예가는 성찬식에 도대체 어떤 형태의 도자기가 알맞을지 몰랐으므로 일단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를 수십 개 만들어 바닥에 늘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미사를 진행하는 프리트헬름 메네케스(Friedhelm Mennekes) 신부를 불러와 도자기들을 직접 살펴보고 적절한 것을 고르게 하였습니다. 그때 선택된 도자기는 지금도 성찬식 때 포도주를 받아 신성한 피로 변환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영재의 예술은 그릇의 진실, 즉 성화(聖化)하는 존재를 도자기 속에 놓았고 그 속에서 계속해서 작동하게 하였습니다. 마치 도자기에서 진실이 샘솟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통해서 그릇의 참된 존재가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도예가 이영재. 사진=https://galerie-karsten-greve.com/kuenstler/detail/young-jae-lee?tab=start

그런데 그릇은 자신 속에 담긴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놓여 있는 곳도 성스럽게 합니다. 그릇에서 진실이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도예가는 신부를 위해 도자기들을 진열하면서 이를 경험하였다고 합니다. 도자기들이 깔린 공간에 거룩한 분위기가 감돌았던 것입니다. 그 후로 이영재는 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각각의 공간에 맞추어 자신의 도자기들을 진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종의 설치 미술 전시회였습니다. 그 가운데 2006년 독일 도시 뮌헨의 현대 미술관(Pinakothek der Moderne)에서 개최되었던 전시회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이영재는 2년여에 걸쳐 빚은 무려 1111개의 그릇을 미술관 내부의 거대한 원형 공간에 여유롭게 내려놓았습니다. 원래 그 자리는 관람객들의 왕래를 위해 사용되었으나 그릇들로 인해 더이상 오갈 수 없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마치 그 장소는 신성한 존재자에게 바쳐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도자기들이 그 공간에 거룩한 분위기를 감돌게 하였습니다. 원래 미술관은 일종의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아무도 미술관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전시된 작품들을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미술관을 방문할 때는 그 성스러움이 잘 의식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에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111개의 그릇은 그것들과 아울러 그 주변 및 사이의 공간에 관람객들의 시선이 향하게 하였습니다. 다시 거룩함으로 채워진 그 공간으로 말이죠. 그 거룩함을 경험하면서 관람객들은 스스로를 성스러운 존재자로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술관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 거룩함은 미술관이 위치한 도시 전체에 신성한 분위기를 감돌게 하였을 것입니다.

 

도예가 이영재는 2년여에 걸쳐 빚은 무려 1111개의 그릇을 무대에 내려놓았다. 사진=이영재

이제까지 예술의 본재에 관한 하이데거의 규정을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로써 그 생소해 보이던 규정이 독자 여러분에게 다소 친밀해졌기를 바랍니다. 제가 『예술 작품의 샘』을 이해하고 번역할 때는 도자기 예술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술의 본재 외에 여러 다른 규정 및 개념도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제가 공방에 여러 차례 머물며 작업을 지켜보고 직접 물레도 돌릴 수 있도록 배려해준 도예가 이영재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 여러분도 자신에게 익숙한 예술이 있을 것입니다. 그 예술이 이 어려운 책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인내심을 가지고 『예술 작품의 샘』을 읽는다면, 거기에서 벌어지는 생각의 향연이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입니다.

 

 

 

한충수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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