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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2] 프루동도 개탄한 톨스토이의 여성관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2] 프루동도 개탄한 톨스토이의 여성관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10.24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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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철학
1848년에 찍힌 톨스토이의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1848년에 찍힌 톨스토이의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교육 이론에 대한 관심으로 톨스토이 1860년에 다시 서유럽으로 갔다. 영국에서 그는 디킨스의 교육에 관한 강의를 들었고 러시아 망명자인 게르첸을 만났다. 브뤼셀에서는 국가 간의 무력 충돌 -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작업을 막 마친 프루동을 만나 깊은 인상을 받았고, 프루동은 1861년 농노 해방 소식에 감명을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해방된 농노와 그들의 전 주인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평화중재인으로 임명되었다. 그 경험은 그에게 소송에 대한 영구적인 혐오감을 남겼고 나중에 그는 누구도 법원에 불만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전복적인 문학과 혁명가들을 찾기 위해 그의 학교를 급습한 경찰은 그를 정부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했다. 그뒤 알렉산더 2세에게 분노의 편지를 써서 자신이 공모자임을 부인하고 자신이 선택한 직업을 '인민을 위한 학교 설립'이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인간의 가장 가슴 아픈 비극은 언제나 침실이다"

톨스토이는 계속해서 매춘부와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영지에 사는 기혼 농노가 그의 아들을 낳았으나 1862년 소피 안드레예브나 베어스와 결혼했다. 그녀가 낳은 13명의 자녀 중 4명은 사망했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여성관(프루동과 개탄할 정도로 공유한), 즉 삶에서 주요 역할은 모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톨스토이는 “아무리 옷을 잘 차려입고 자신을 어떻게 부르고 아무리 세련되어도 출산을 자제하고 성관계를 삼가하지 않는 여성은 창녀다. 그리고 여성이 아무리 타락해도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는 데 전념한다면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훌륭하고 최고의 봉사를 수행하며, 즉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그녀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썼다. 그는 나중에 여성을 위험한 유혹자, 남자를 기분 전환시키는 존재로도 보았으나 강한 성욕 때문에 결국 독신으로 남아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크로이처 소나타』(1890)에서 그는 욕망이 결혼을 하게 만든다면 가능한 한 순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지진, 전염병, 끔찍한 질병 및 모든 종류의 육체적 고통에서 살아남지만, 가장 가슴 아픈 비극은 언제나 침실이다.'라고 고백한 그는 섹스를 가장 큰 악으로 여기고 온전한 순결을 권고했다. 그것은 노인이 되어서도 이룰 수 없는 이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성의 본성이 모성에서 가장 충족되고 출산이 없는 성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루동처럼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은 그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동일한 교육을 주창했다. 그래서 딸을 아들과 같은 방식으로 키웠고, 딸들은 그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되었다. 

『크로이처 소나타』의 표지

그는 자유로운 사랑을 거부하고 일부일처제를 인간의 자연법칙으로 생각하며 결혼을 성의 유일한 도덕적 출구로 옹호했지만 일기에 “나는 물론 모든 법적 제한에 반대하고 완전한 자유를 지지한다. 유일한 이상은 순결이지 쾌락이 아니다”라고 썼다. 이 점에서 톨스토이는 불에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지만 성적인 정욕을 완전히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한 성 바오로의 가르침을 따랐다. 

『전쟁과 평화』, 전쟁은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만들어 진다

결혼 후 톨스토이는 볼가 소유지에 정착하여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평화』(1863~1869)를 집필했다. 원래는 1825년 시베리아로 추방된 데카브리스트 반란군 중 한 명울 주인공 영웅으로 만들 계획이었지만 결국은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 이전 시대로 바꾸었다. 

1956년 소비에트의 우표에 등장한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
1956년 소비에트의 우표에 등장한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 『전쟁과 평화』. 사진=위키미디어

'나는 정치가보다 인민의 역사를 더 자유롭게 쓸 것이다.’ 프루동의 『전쟁과 평화』에서 제목을 딴 톨스토이는 역사가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수많은 상황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령 군사적 승리는 체스 게임처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운명을 구성하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본 그의 입장은 마르크스에 가깝지만 후자는 불가피성에 대한 확신은 공유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당시 장교를 때린 혐의로 기소된 군사 법원에서 개인을 변호하기도 했는데 그가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자 국가의 사법 및 군사 기관에 대한 톨스토이의 증오는 더욱 커졌다. 그는 나중에 『나는 침묵할 수 없다』(1908)에서 사형을 반대했다. 교육에도 계속 관심을 갖고 농민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와 입문서를 썼다.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1874-82)는 당시 톨스토이가 경험한 창의적인 예술가와 헌신적인 도덕가 사이의 딜레마를 묘사했다. 안나와 마찬가지로 그는 두 가지 모순적인 힘, 즉 삶을 파악하는 활력감(Anna는 '살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함')과 삶의 무의미함과 비극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종교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수도원도 여러 곳을 방문했으며, 결국 복음서, 특히 산상 수훈에 기초한 사랑의 종교로 개종했다. 그것은 그의 평화주의적 아나키즘 철학의 출발이 되었다. 

“악에 저항하지 말고, 모두를 용서하십시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낸 일련의 책, 소책자 및 논평에서 톨스토이는 매우 정교하게 기독교의 비정통적 해석을 계속 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성한 아들이 아니라 위대한 도덕 교사이고 인간은 모두 무한의 일부이지만 사후 세계는 없다고 했다. 신은 우리를 심판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랑과 이성 사이에는 낭만적인 분리나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사랑이어야 하고' 사랑은 이성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계명을 추론했다.

(1) 화를 내지 말고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십시오. 
(2) 성적 만족에 빠지지 마십시오. 
(3) 아무에게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4) 악을 대적하지 말며 심판하지 말며 법에 응하지 말라. 
(5) 국적을 가리지 말고 나그네를 자기 백성과 같이 사랑하라 

첫 번째 계명은 모든 정부가 조직적인 폭력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그의 아나키즘을 확증했다. 네 번째 계명인 '악을 대적하지 말라'는 무저항, 즉 폭력으로 악을 대적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발전시키도록 이끌었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득으로 악에 저항하고 악의 제도가 기반을 두고 있는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다섯째 계명은 민족적 차원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격언에 대한 톨스토이의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애국심, 심지어 피억압자의 애국심을 거부하는 것을 포함했다. 이 모든 계명이 한 계명, 즉 너희가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너희에게 하라 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톨스토이는 모든 정부, 법률, 경찰, 군대 및 모든 생명 또는 재산 보호가 부도덕하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법은 항상 사람의 법보다 우월하므로 “나는 폭력으로 사람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부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 나는 판사나 재판에 참여할 수 없다. 또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법정과 관공서에 참여하도록 도울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또한 누구도 다른 사람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가질 권리가 없다고도 했다. 

비록 톨스토이는 탐욕, 분노, 정욕을 청교도처럼 맹렬히 비난했지만, 다른 세속의 도덕주의자와는 달리 자연에 가까운 삶, 자발적 봉사, 가족, 우정, 고통 없는 죽음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을 추천했다. 더욱이 그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는 개인에게 삶은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폭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살면 만족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아나키스트에게 1881년 암살당했다. 사진=위키미디어

톨스토이의 새로운 도덕적, 종교적 신념은 그를 훨씬 더 적극적이게 만들었다. 1881년에 그는 새로운 차르에게 편지를 보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자들을 용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악을 선으로 갚고, 악에 저항하지 말고, 모두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그에게 귀를 막은 차르는 톨스토이를 구속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작품을 금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882년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에서 인구 조사에 참여하여 처음으로 빈민가를 방문했다. 그 끔찍한 경험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더욱 강화시켰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배심원 봉사를 거부했다. 그리고 유흥이나 식욕을 위해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여 피가 튀는 스포츠를 포기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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