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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부즈맨 칼럼이란 전문가 범죄는 밖에서 깨야한다
옴부즈맨 칼럼이란 전문가 범죄는 밖에서 깨야한다
  • 황진태 / 대자보 기자
  • 승인 2006.04.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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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담스럽도록 ‘안이한’ 옴부즈맨칼럼…'을 읽고

▲이득재 교수의 글이 실렸던 교수신문의 인터넷판 ©

대구가톨릭대 이득재 교수는 교수신문 4월 2일자에 기고한 <부담스럽도록 '안이한' 옴부즈맨칼럼…커넥션부터 끊어야>에서 중앙일보의 옴부즈맨 칼럼에 대하여 “중앙일보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는 제기하지 않은 채 두루뭉실 넘어가거나 하나마나한 예기들만 한다는 인상이 짙다.”고 질타하고 있다. 여기서 이 교수가 순수한 건가하고 묻는다면 실례일까. 이번 글은 이 교수의 순수어린 칼럼에 대한 반론이기보다는 커넥션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신문사 내부보다는 외부로부터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쓴 보론이다.

<예술의 공모>에서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의 모든 이중성은 바로 무가치, 무의미, 비의미를 요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이미 무가치한데도 무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라며 ‘평론가-소비자-미술판매상’들의 “예술의 공모”를 “전문가 범죄”라고 지적했다.

실제 가격도 형편없는 현대예술작품에 대해서 평론가는 온갖 철학적인 담론과 미사여구를 불어 넣어 작품의 가격을 높이는 행태가 얼핏 봐서는 “무가치, 무의미, 비의미”적인 행태라고 보일지 모르나 이러한 공모는 판매상에게는 금전적 이익을 소비자에게는 훌륭한 예술작품을 획득했다는 만족감을 평론가에게는 상징권력을 안겨주는 ‘남는 장사’다.

이와 비슷한 작동방식으로 옴부즈맨 칼럼을 통해서 신문사는 겉으로나마 정론지라는 이미지를 독자로부터 구하며 기고자에게는 상징권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커넥션의 혜택이 돌아간다. 필자는 중앙일보보다 조선일보가 이러한 홍보를 더 훌륭히 수행했다고 본다. 가령 조선일보의 <조선일보 지면비평>란을 담당한 기자는 옴부즈맨 칼럼이 “밥을 먹고 있는 조직의 내부 허물을 바깥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며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몇몇 언론시민단체의 매체비평을 접해본 독자라면 <조선일보 지면비평>을 읽으면서 정론지가 되고자 하는 조선일보의 진실성을 믿는 이가 몇이나 될까 의문이다. 보수언론의 옴부즈맨 칼럼 악용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여기서 보수언론 뿐만 아니라 개혁성향의 신문도 짚어보자. 한겨레의 경우 그간 <한겨레비평>이란 외부 필진을 통한 자사 비판 코너를 운영하다가 영문을 모르고 중단되었다. 이후에 간헐적으로 ‘한겨레를 읽고’라는 코너를 독자마당에서 운영하다가 얼마 전부터 <한겨레비평>에 버금하는 수준의 ‘맛이 쓴 비평’으로 홍세화 시민편집인이 자사 비판을 시작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겨레비평>의 중단이 한겨레가 자사 비판이 두려워했다기보다는 민언련 등의 언론감시 시민단체나 미디어 비평 방송의 역할과 영향력 증대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옴부즈 역할 이양이 이뤄졌다고 본다.

즉, 이 교수 말대로 본래 옴부즈맨 칼럼에서 기대했던 “신문내용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신문 ‘안’이 아니라 ‘밖’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한겨레 수준의 매체라면 보수매체의 옴부즈맨 칼럼 보다야 진실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하여 한겨레를 중도보수로 보는 시선이 분명 존재하고, 이들의 시선에서 한겨레 내부의 자사비판 칼럼으로는 그들의 불만을 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외부에서의 외부의 시선이 필요하다.

한국언론의 미래를 긍정한다면 몇 년 전과 비교하여 조선일보의 <조선일보 지면비평>이나 중앙일보 등의 보수매체에서 자사 비판을 하는 칼럼이 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획기적인 변화라고 칭찬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보수매체의 변화는 신문내부로부터 추인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강준만 교수를 비롯한 안티조선과 같은 언론개혁운동 세력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벤담이 열망했던 파놉티콘Papnopticon의 핵심은 ‘시선의 비대칭’이다. 과거 언론은 국민, 독자들의 머리 위에서 계몽이란 미명하에 감시하고 군림하려 들었지만 언론민주화가 진전된 오늘날에는 파놉티콘의 ‘시선의 비대칭’은 시놉티콘Synopticon 즉, 신문뿐만 아니라 독자, 시민단체, 지식인 또한 동시에(syn) 신문을 감시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 교수는 “필자는 전문가를,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바로 그 자폐증환자라고 생각한다. … 우리 시대의 숱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자폐증에 걸려 있다. … 언론학자들이 스스로 그 전문성을 내세워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무능력, 혹은 그것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덮어버리는 것이다.”라고 지적 했는데 필자는 앞서 보드리야르를 언급하며 예술시장에서 벌어지는 “전문가 범죄”의 당사자들은 손해를 보지 않고 있음을 지적했지만 신문시장에서는 독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음에 주목한다. 피해의 내용은 (다른 방법도 숱하게 있겠지만) 옴부즈맨 칼럼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정론지로 착각하게 만들어 이 신문을 통하여 사회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제공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모에 대한 “전문가 범죄”의 피해자를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시민단체 혹은 대안-대항언론을 통해서 ‘가치와 의미’를 찾는 또 다른 ‘공모’를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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