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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0] 톨스토이가 말한대로의 삶을 산 아나키스트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0] 톨스토이가 말한대로의 삶을 산 아나키스트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10.07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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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의 평가와 영향
폴 애버리치는 크로토포킨이 "신 없이도 성인이 되는 과업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사진=위키미디어

프랑스에서 나오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잡지의 1921년 2월 9일(818호)자에 크로포트킨의 조사를 쓴 프랑스 소설가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은 자신이 좋아한 톨스토이가 손으로 쓴 것을 크로포트킨은 몸으로 살았다고 썼다. 즉 톨스토이가 예술로 개화한 도덕적 순결과 자기희생과 인류애라는 이상을 크로포트킨은 그 개성 속에 솔직하고도 자연스럽게 체현했다고 찬양했다. 폴 애버리치는 크로포트킨이 “신 없이도 성인이 되는 과업을 달성했다”고 했다.(애브리치, 『아나키스트의 초상』, 136)  

혁명가로서 크로포트킨은 다른 혁명가들이 이기주의나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 것과 달리 평생 고결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물질적 성공과는 담을 쌓고,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문제를 낳지 않았다. 그 누구도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도 지배되지 않았다. 19세기 당시 바쿠닌이나 바그너가 지녔던 반유대주의나 물욕과도 무관했다. 그는 관대하고 사려 깊었으며 훌륭한 지성, 성실 및 따뜻함의 소유자였다. 

그는 친구든 낯선 사람이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항상 자신의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러시아 최고의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지위와 부의 특권을 포기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그것은 두 차례의 감옥살이와 함께 그의 삶의 대부분을 망명으로 이끌었다. 개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이 끝날 때까지 자유의 대의라고 생각한 것을 위해 계속 일하고 글을 썼다.

“인간은 협동적이고 사회적인 동물이다”

사상가로서의 그는 아나키즘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경향을 대표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또한 아나키즘의 모든 결론이 과학적으로 검증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정확한 과학의 방법론을 채택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진화론,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에서 확증을 얻는 것이 하나의 철학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으며, 그의 지리적 발견과는 별개로 과학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진화의 요인으로서 사회성 있는 종들 사이의 상호협조에 대한 강조였다. 

현대 사회 생물학자들은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인간 행동의 생물학적 뿌리에 대해 탐구하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정당성 찾으려 했다. 이들은 사회 다윈주의자들이었으나 크로포트킨은 이들의 생각에 반대했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이 협동적이고 사회적 동물이며, 강압적인 권위에 의해 최소한의 간섭을 받지 않을 때 대부분 연대와 상호 원조를 실천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사회는 그들의 관습이 강압적이고 여론이 폭군적일 수 있더라도 조화와 협력의 원칙에 의존한다고 했다. 

바진
바진(巴金, 1904~2005). 사진=

크로포트킨의 영향은 컸다. 일본의 고도쿠 슈스이, 중국의 바진(巴金, 1904~2005), 인도의 간디, 미국의 루이스 멈퍼드와 폴 굿맨(Paul Goodman)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가 살았던 러시아와 영국은 물론 프랑스, ​​벨기에 및 스위스의 아나키즘 운동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농업과 공업의 조화로운 균형에 기초한 탈중앙화 사회를 지향하고 정신과 육체적 기술의 통합교육을 주장했다. 그의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접근 방식은 기존 국가의 껍질 내에서 대안 제도를 개발하고 사회 내에서 아나키즘적 경향의 발전을 장려하려는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어왔다. 

자연에서 협력을 발견했던 아나키스트

개인이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회가 자연의 일부라는 그의 예리한 인식은 그를 현대 사회 생태학의 선구자로 보게 한다. 크로포트킨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인 글을 썼지만 그 글의 명확하고 단순한 스타일은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복잡한 철학적 주장이나 어려운 과학적 데이터를 다루면서도 그는 항상 평범한 사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발적인 조직이 얼마나 성공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 구명정 협회, 중앙 기관 없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복잡한 계약이 얼마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국제 철도, 또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분배가 어떻게 조직 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영국박물관 도서관 등을 그의 주장을 생생하게 예로 들어 설명했다. 

곤충학자들은 개미가 초유기체로서 함께 행동한다고 봤다. 사진=위키미디어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 2판에서 “1판 이후 12년이 지났고 상호협조가 진화에서 중요한 진보적 요소라는 생각이 생물학자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무자비하고 개인주의적인 의미에서 ‘적자생존’으로 진화를 보는 단순한 견해가 지속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생태학자들은 협력을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몇 곤충학자들이 개미가 '초유기체'로서 함께 행동하는 방식을 고려했다.

그리고 제2차대전 이후 냉전 기간 동안 게임 이론가들은 최적의 의사 결정과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협동과 이타주의 이면의 논리를 연구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진화 생물학자인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이 협동적이고 이타적인 행동의 유전학을 탐구했고, 사회생물학자인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는 서로 무관한 개인 간의 협력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를 확장했다. 

오늘날 협력은 새로운 수준의 조직을 구축하는 진화를 위한 기본으로 인식되고 있다. 게놈, 세포, 다세포 유기체, 사회적 곤충, 복잡한 생태계, 그리고 실제로 인간 사회의 출현은 모두 협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크로포트킨의 기여는 중요했고 당연히 인정을 받고 있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이 정치에 의해 왜곡되기 직전에 재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자연에 대한 그의 관찰은 그의 아나키즘을 강화시켰으나 오늘날 그처럼 사는 과학자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개인주의 아나키즘을 비판한 아나키스트

내가 『표트르 크로포트킨 평전』을 쓴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삼자주의에 입각한 사회적 아나키스트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 사상의 핵심은 개인이 아니라 민중이다. 그러나 개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나키즘 하에서만 진정한 개인의 자유가 가능하다고 보고, 자본주의하의 개인주의는 허위라고 본다. 크로포트킨은 그러한 개인주의 내지 개인주의 아나키즘을 비판한다. 특히 니체와 그의 영향을 받은 막스 슈티르너를 비판한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의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의 『표트르 크로포트킨 평전』 표지

모든 해방의 기초인 평등을 저해하는 그들은 스스로 ‘우월한 종족’을 대표한다고 상상하는 자들, 국가, 교회, 현대법, 경찰, 군사주의, 제국주의, 기타 모든 종류의 억압에 위험스럽게 가깝다고 비판했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이 국가로부터는 자유여야 하지만 사회로부터는 결코 자유일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최고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는 아나키 사회다. 그 사회는 결코 개성을 억압하지 않는다. 나아가 크로포트킨은 그 어떤 아나키스트보다도 자연의 중요함을 인식했다. 

앞에서 본 바쿠닌이 혁명가라면 크로포트킨은 과학자이다. 두 사람은 같은 러시아 귀족 출신이면서도 성격부터 달랐다. 바쿠닌이 자유분방하고 활동적인 반면 크로포트킨은 온건한 성격과 사고의 소유자였다. 크로포트킨은 바쿠닌이 제안한 비밀 혁명정당이라는 아이디어를 거부하고 사회적 해방이 독재적 수단보다는 아나키즘적 수단에 의해 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목적과 수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게오르크 브란데서. 사진=위키미디어

그러나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바쿠닌이 모순에 가득 찬 사람인 반면, 크로포트킨은 어떤 모순도 없이 일관되고 전체론적인 조화의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크로포트킨의 삶은 높은 윤리적 기준과 그의 저작물 전반에 나타난 생각과 행동의 조합을 잘 보여준다. 그는 다른 많은 혁명가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이기심, 이중성 또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나타내지 않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를 자신이 아는 정말 행복한 두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에 서문을 쓴 덴마크 철학자 게오르크 브란데스는 “이 사람보다 청렴하고 인류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고 크로포트킨을 찬양했다. 크로포트킨을 성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왕자나 공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런 호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은 과학자와 도덕주의자의 자질과 혁명적 조직가이자 선전가의 자질을 결합했다. 온건한 자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아나키스트 투사 초기에는 ‘행위에 의한 선전’ 즉, 구두 및 서면 선전을 보완하고 사람들의 반항적 본능을 깨우는 데 투신했다. 그는 영국과 러시아의 아나키즘 운동의 주요 창시자였으며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의 운동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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