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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證보다 '드러내기' 목적, 그러나…
立證보다 '드러내기' 목적, 그러나…
  • 송호근 서울대
  • 승인 2006.04.08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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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희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제392호)을 읽고

평등주의는 習俗이 아니라 ‘불공정 경쟁’의 유산이다. 필자는 평자의 이 간결한 명제에 동의한다. 이 책에서 주절주절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한 마디로 축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등주의적 심성, 뒤집어 말해 ‘불평등에 대한 관용결핍증’이 集團心의 中核인 ‘듯하다’는 필자의 흐릿한 명제를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평자의 냉철한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입증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니라, 평등주의적 심성이 한국 사회 도처에 지피는 불만의 불꽃들을 묘사하고 그 불꽃 속에서 광란의 춤을 추는 온갖 갈등의 실체를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드러내기’는 사회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차적 과제이고, 그것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은 그 다음의 과제이다. 말하자면, 평자는 필자에게 이차적 과제를 요구했던 셈인데, 그 요구는 ‘한국의 평등주의 II’를 기획하고 있는 필자에게 적지 않은 격려가 된다. 언제 착수될지 필자 자신도 모르는 ‘평등주의 II’는 인과관계를 포함, 관용결핍증의 기원, 기능, 결과를 규명하는 방대한 작업이 되리라고 꿈꾸기는 한다.

  그래서 이 밑그림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소책자 형태로 꾸며진 이 밑그림은 필자에게는 ‘생각의 지도’이고 독자에게는 ‘이해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탐험가에게는 말이 쉬어가는 휴게소, 옛날 식으로 말하면 역첨같은 것을 군데군데 표시해 놓은 지도가 유용하다. 징키스칸의 군대가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역첨제는 부다페스트와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연락병이 몽고의 수도 카타호름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길을 안내하는 정거장이었다. 이 책에는 몇 개의 중요한 역첨이 있다.

  ‘평등주의적 심성은 한국인의 마음에 내장된 일종의 습속이다’라는 매우 과감한 명제가 그것이다. 그것을 증명해 보라는 사회과학적 요구는 한국역사와 사회에 대한 종합적 관찰을 필요로 한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서원을 지키는 양반, 선비집단과 관직에 진출한 고위관료들의 經學을 해독해야 한다. 조선 말기,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서양문물이 밀려들어올 때 개화파의 세계관에 평등주의가 어떤 형태로 싹텄는가를,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어떻게 굴절, 왜곡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런 것 외에도, 인구밀도가 높고 서로 어깨를 맞대고 사는 생활양식이 오래 지속된 지역에서는 어떤 일에도 남과 견주는 습성이 자연스럽게 발달될 수 있다는 인류학적 가설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동네에는 비밀이 없다’는 우리식 공동체의 관습에는 항시적 감시와 비교의 눈길이 작동하고 있다. 감시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항상 도덕적이기를 강제하고, 비교는 서로 평등해질 것을 부추긴다.

  ‘교양없는 중산층’의 탄생은 두 번째 역첨이다. 듣기에는 조금 거북한 이 말은 서양의 중산층에 견주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산층은 한국사회를 꾸려나갈 독자적 가치관, 그것도 상층과 하층이 동의하고 동참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관을 만들어 내었는가라고 질문해보면 답은 매우 궁색하다. 소중하기는커녕, 이른바 ‘민중적’ 가치관과 담론에 밀려 허우적거리는 것이 요즘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 굴레를 씌우려 하지는 말고, 우선 중산층이 성장해온 역사적 궤적과 그것에서 드러나는 중산층의 탐욕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산층을 중산층답게 만드는 필수요소를 ‘자유’라고 한다면, 중산층은 자유이념을 권위주의체제에 저당 잡히고 ‘성장’의 행진에 가담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1987년의 6.10 항쟁은 무엇인가?라고 반문해 봐야, 탐욕에 매몰된 중산층의 습성은 이후의 민주화 과정에서 더욱 증폭되었을 뿐, ‘자유’에 수반되는 도덕, 의무, 배려, 계층적 자존심 등에는 대충 소홀했음을 지적받아야 한다. 교양은 중산층의 자존심의 원천이자 세계관의 영양제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과 거듭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재산축적의 열기를 더욱 내뿜었던 것은 중산층이었다.

  이것이 ‘자유주의로 견제되지 않은 평등’이 진보이념과 결합하게 되는 한국적 메카니즘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양 축인 자유와 평등을 모두 ‘권리’개념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다른 국가의 민주화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민주화 공간에서 갑작스럽게 형성된 자유-권리-평등의 삼각 고리는 이후의 전개과정에서 중산층의 ‘자유-권리’와 하층의 ‘평등-권리’로 양분되었고, 급기야는 양 계급의 권리투쟁으로 번졌다.

평등주의가 결국은 공정성(fairness) 문제라면, 공정성은 권리투쟁의 공간에 던져져 계급적 이해충돌과 보수/진보의 일대 격돌을 낳았다. 평등없는 자유는 무의미하지만, 자유없는 평등은 급진화한다. 자유주의로 견제되지 않은 평등이념이 분출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했는데, 이것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규명하지 않으면 어떤 협력 시도도 결렬된다. 현정권에서 그토록 강조한 소중한 가치, ‘대화와 토론’이 일방적 강요로 귀결되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자유주의로 정제되지 않은 평등’의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배경을 밝히는 일이 필자가 다소 성급하게 끄집어낸 協治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평등주의적 심성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된 배경을 밝히고 사회성원들이 왜 서로에게 강도 높은 불만과 분노를 표출해 왔는가를 다소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협력정치를 통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송호근/서울대·사회학

 

 필자는 하버드대에서 ‘한국의 국가와 노동시장, 1961-1987’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시장과 복지정치’, ‘신사회운동의 사회학: 세계적 추세와 한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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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2006-04-19 02:27:57
뒤늦은 반응입니다. 이 글을 최근에야 읽게 되어서... 송호근 교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은 보지 못했지만 분위기는 짐작이 됩니다. 짐작하건대 우리 시대의 거인으로 서고 싶어하는, 그러나 아직은 갈 길이 무척 멀어보이는 송 교수께 세 가지만 부탁합니다.

첫째, 학문적으로 성실해주십시오. 송 교수는 자신이 드러내기만 하면 되고 입증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사회과학자가, 월급 받는 교수가 입증 안하면 누가 한다는 겁니까?

둘째, 겸손해주세요. 누구의 어떤 지지와 헌신 때문에 이런 자유와 세상의 주목을 누리고 있습니까? 학생들? 납세자? 일반 국민들? 독자들? 누구에게 겸손해야 할지 잘 생각해보세요.

마지막,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재벌이나 권력과의 유착을 끊으십시오. 삼성이나 중앙일보, 혹은 조선일보와 단절하세요. 그리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가진 사람들 편에 서고 있는데 여기서 자유로와지기 바랍니다. 송 교수께서 지난 몇 년 신문에 쓴 글을 보면 애처롭습니다. 돈과 권력에서 자유로와지세요. 그러면 진정한 보상과 보람이 따를 것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송 교수께서 앞으로 무척 좋아지리라고. 그러나 아직은 멉니다. 정진하세요.

개밥 2006-04-18 15:16:16
서평 대상이 된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서평과 그 반론을 읽으면서 사회과학자가 사회에 대해 연구하고 발언하는 그 근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송호근 교수는 자기 책의 서평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줄여서 이해하자면, 평등주의가 사회 갈등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평등주의의 연원을 찾는 일을 하는 데 있어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은 아직 입증되지는 않았으나, 송 교수가 마음에 담고 있는 가설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썼다는 점에서 양해를 구하는 형태로 반론 아닌 반론을 하고 있다.
우리 역사와 사회의 모든 부분들을 잘 가려내어 가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게 된다면 학자로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송 교수가 하고자 하는 그 일이 잘 된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짧은 생각이건대, 돌이켜보면 평등주의는 이주희 교수의 서평대로 습속의 문제보다는 불평등의 유산임에 분명하다고 본다. 따라서 그것이 굳이 평등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구성될 성질의 주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자유주의로 견제되지 않는 평등주의'가 갈등의 주범이 아니라 자유로워 본 적이 없는 하층의 불평등했던 유산이 평등에 대한 요구로 드러날 뿐이다. 마냥 돈과 권력을 통해 한없는 자유는 만끽해온 이 땅의 상층들에게 그 자유의 일부를 자신들에게 나누워달라는 목소리는 어떤 '주의'로서의 평등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부르짖음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왕에 갈등의 원인을 찾는 작업에 사회학자가 나섰다면, 그것이 '평등주의라는 습속의 연원을 밝히는 작업'이기보다는 평등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나누어 갖기를 원하는 '자유'의 실체를 찾는 데 노력을 경주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