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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에 대한 풍자에서 풍속 스케치로
현학에 대한 풍자에서 풍속 스케치로
  • 김광우 미술평론가
  • 승인 2006.04.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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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예술: (8) 乞人畵

걸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것엔 다분히 화가의 사회비판적 의도가 작용한다. 빈곤을 퇴치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걸인에게 인간 존엄성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걸인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보통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중세에는 바보를 배에 태워 먼 곳으로 격리시키거나 도시 성밖으로 내쫓았다. 저능아와 정신분열자 뿐 아니라 게으른 사람이나 알코올 중독자도 사회로부터 격리했다.

이들은 산과 들을 떠돌며 행인들의 짐을 빼앗고 떼를 지어 민가를 습격했다. 일찍이 북유럽 화가들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와 피테르 브뢰헬(1525?~1569)의 작품에서 바보, 걸인, 불구자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이들이 빠지면 진정한 풍속화가 될 수 없다. 사회 하층민들이 부자들의 공간을 장식하는 그림에 등장한 건 네덜란드 풍속화에서 기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으로 화면 가득 채우는 전신인물화는 벨라스케스에 와서야 가능했다. 전통적으로 인물화는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전신인물화의 경우 왕에게만 국한되고 귀족에게는 반신인물화가 허용되다가 나중엔 권력을 가진 귀족도 전신인물화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인물의 권위를 과장하는 수단이 일반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시민 그것도 천대받는 걸인의 전신을 그리는 건 벨라스케스 전엔 없던 일이다.

벨라스케스에서 시작된 걸인 회화의 전통과 변용

▲벨라스케스 作, ‘메니프’, 1638년경, 캔버스에 유화, 179×94cm. ©

 

벨라스케스(1599~1660)는 열아홉 살 때 보데곤(bodegone) 시리즈를 그렸는데, 보데곤이란 정물화적 모티프로 일상의 주제를 다룬 회화를 말한다. 이런 유형은 네덜란드의 떠들썩한 풍속화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였다. 벨라스케스는 남루한 옷차림의 ‘시빌의 물장수’(1620년경)에 진지함과 위엄을 불어넣었다.

그는 대상을 그 자체로 가치있게 다루면서 냉정한 사실적 태도로 재현했으며 나중엔 인물묘사에까지 확장하면서 전체 구성을 일관성과 기념비성으로 했다.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걸인화는 1638년경에 그린 두 점의 ‘애솝’과 ‘메니프’다. 두 작품은 배경을 단순화시켜 전신인물화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단순 배경으로 모델은 더욱 두드러지며 관람자 앞으로 나온 모습이다. 비애, 유머와 인간적 이해를 담은 그의 걸인화는 후세 화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같은 에스파냐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82)와 호세 데 리베라(1591~1652)도 걸인화를 그렸는데, 무리요는 ‘걸인 소년’(1650)을 리베라는 ‘걸인’(1642, 왼쪽 그림)을 각각 그렸다. 무리요는 걸인 소년을 작품에 도입해 새로운 순수 풍속화의 유형을 만들었다.

▲무리요 作, ‘걸인 소년’, 1650, 캔버스에 유화, 134×100cm. ©

 

 ‘걸인 소년’은 초기 사실주의를 보여주는 예이며, 그 후에는 좀더 이상화한 아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프랑수아 봉빈이 1845년에 그린 ‘꼬마 굴뚝청소자’는 무리요의 ‘걸인 소년’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벨라스케스에서 고야에 이르는 에스파냐 전통에서 중요한 특징인 개인의 존엄에 대한 경의에 기반을 둔 그림을 그린 리베라는 ‘술병을 들고 웃는 주정꾼’(1638)을 그렸다. 리베라는 걸인과 부랑자의 모습으로 그린 철학자 연작을 통해 바로크 회화를 확장했는데, 아카데미의 현학적 태도를 비웃기 위함이었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1746~1828)는 30대 초에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기법을 익혔으며, 1778년에 그린 ‘눈먼 기타 연주자’는 ‘메니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고야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걸인에게 느낀 매력을 처음 표현한 것으로 머리를 뒤로 젖힌 눈먼 걸인의 모습은 뒤틀린 이목구비의 융합체를 이룬다. 괴상하게 생긴 눈먼 기타 연주자는 풍자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고야의 어린 7명의 자식들이 연달아 죽은 것은 얄궂은 운명이었다.

인생의 즐거움을 그리라는 주문과 함께 자식들의 잇따른 죽음을 견뎌야 했던 정신적 부담이 젊은 그에게 무엇인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 1770년대 말과 1780년대에 그린 작품에는 대부분 비타협적 양식이 나타나 있다.

▲고야 作, ‘눈먼기타 연주자’, 1778년, 캔버스에 유화. ©
‘눈먼 기타 연주자’는 그의 작품 중 가장 크고 야심적이며 독창적인 작품이다. 관행에서 벗어난 이 작품은 고야의 회화가 동시대인의 회화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마네의 시대에도 걸인 회화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에두아르 마네(1832~83)도 ‘메니프’에서 영감을 받아 ‘철학자 (망토를 걸친 걸인)’과 ‘철학자 (굴과 걸인)’을 그렸다. 마네는 걸인을 철학자의 모습으로 그렸으며, 한 걸음 나아가 모델로 변형된 진지한 모습의 ‘넝마주의’(1869)를 그렸다. 바닥에 술병을 놓아 모델이 독한 압생트에 중독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과 ‘늙은 음악가’도 그렸는데, 모델은 마네의 작업실 부근에 살던 바이올린 연주자 집시 장 라렌느로 그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경찰들로부터 몹시 천대를 받았다. 마네는 라렌느를 화면 중앙에 고대 철학자의 모습으로 앉히고 아이들의 호기심과 사랑을 받는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크리스포스를 묘사한 헬레니즘 조각을 변형한 것이다.

피에로처럼 생긴 아이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고 놀라운 시선으로 늙은 음악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늙은 걸인을 바라보는데 라렌느는 마치 기념촬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옆에 걸터앉아 라렌느를 바라보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와 두 소년도 따로 그려서 하나의 그림으로 합성시켰는데 이는 당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마네는 처음으로 레몬껍질과도 같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들뜨게 만든 ‘압생트…’를 살롱전에 출품했고, 심사위원 중 한 사람 들라크루아가 옹호했음에도 다수의 반대로 낙선됐다. 이 작품은 6년 이상 마네를 가르쳐온 쿠튀르에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쿠튀르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바로 이 작품을 그린 장본인이다”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마네에게는 첫 성공작이다. 주정뱅이 걸인을 그린 그림은 교육적 목적을 중시하는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렸겠지만 대충 문지른 듯한 붓질과 자유로운 소묘는 갈고 닦은 솜씨임이 분명했다. 마네는 특별히 사회비판적인 의도를 갖고 이 그림을 그린 건 아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걸인을 주제로 선택한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 걸인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현대도시의 모습 중 하나고 도시의 삶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게 화가의 의무라면 마네가 걸인을 그린 것은 모던 회화의 모티프로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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