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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전쟁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일본군은 전쟁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 박광홍
  • 승인 2022.10.05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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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박광홍 오사카공립대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학부를 졸업할 때만 해도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선택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전공이었던 사회학은 그 학풍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학군사관후보생이었기에 졸업과 동시에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으므로, 대학원은 머나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 내가 군을 전역하고 일본에 있는 대학원에 들어오게 된 것은, 꽤나 충동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싸워서 이기고 지면은 죽어라’는 가사의 군가를 부르고, 총알이 소진되어도 적과 마지막까지 싸우기 위한 총검술을 익히던 나는 문득, 한국군과 옛 일본군의 정신주의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일본군과 관련된 번역서에 재미를 붙이다가, 일본에서 직접 공부를 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잘 다니던 군대를 전역하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었고, 늦은 나이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기록해보리라는 일념으로 일본에 왔고, 대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고백하자면, 나는 학술적인 연구보다는 내가 원하는 취재를 위해 대학원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교육사를 탐독하고, 총력전 이론에 대해 검토해보며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의 일본군인들에 대한 이해를 다질 수 있었지만, 정작 내가 그토록 바라던 당사자들과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내가 석사과정에 들어간 2020년 기준으로 생존해있는 일본군 출신자의 수는 극히 적었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하면서, 고령자를 면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여러 번 고배를 마시며 방황하기를 거듭, 최초의 인터뷰 대상자를 구하는 데만 1년이 꼬박 걸렸다.

SNS, 언론사, 지자체, 지인 등 여러 방면으로부터 협조를 구한 끝에 총 세 분과의 인터뷰를 실시할 수 있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군인·군속으로 근무했던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청취한다는 것. 나를 일본으로 이끌었던 목표가 실현되는 순간이었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나와 다른 세계를 살아온 타자를 만나고, 그 타자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그분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제국 체제가 나의 출신국인 한국을 식민지로 두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부담감을 가중시켰다. 그분들에게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나는 그분들의 구술을 편견없이 고찰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고령으로 발음이 부정확한 분, 방언이 심하신 분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혹은 나 자신의 일본어 능력 부족으로 대화가 종종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편견과 경계에 소통이 가로막히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서로가 타자이기에 이야기가 풍성해진 측면도 있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서로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며 마주 앉은 상대를 이해해보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공부였다.

사진=박광홍

교과서의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 감정적인 반일이나 혐일 정서를 너머 현실에서 만난 옛 일본군 출신자들은, 나와 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는 똑같은 인간들이었다. 그분들이 살아냈던 시대와 체제는 개인의식의 영역을 지워내고 복종하는 신민을 빚어내고자 했지만, 그럼에도 각 사람들의 고뇌와 동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제 몸을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쟁의 참상과 죽음의 운명 앞에 눈물을 흘렸다는 그분들의 이야기로부터, 나는 시대를 초월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근대국가와 국민, 총력전 체제의 정신동원, 집합의식과 개인의식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총력전 체제하 내셔널아이덴티티의 형성과 동요」라는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썼다. 그리고 이 논문을 한국어로 재구성하고 살을 붙여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라는 책을 냈다. 이 연구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부디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체험한 세대가 역사의 저편으로 완전히 저물려고 하는 지금, 그분들의 전쟁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화두를 건져올리는 작업으로부터 나는 사명감을 느꼈다. 전쟁체험 세대의 구술사 기록이 앞으로 얼마나 가능할지, 이를 바탕으로 박사과정을 잘 끝낼 수 있을지는 솔직히 확신할 수 없다. 그저, 군을 전역하고 처음 일본에 발을 딛었던 그때처럼, 열정을 갖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해나간다는 것 그 자체에 의의를 두고 나아가고 싶다.

박광홍 오사카공립대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해병대 중위로 전역한 후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전쟁 체험에 대해 천착하여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도서출판 오월의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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