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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이라고 호의호식의 바람이 전무 했을까
‘고불’이라고 호의호식의 바람이 전무 했을까
  • 윤사순
  • 승인 2022.09.20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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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같은 한 선비의 실화

본능적 욕구를 이겨낸 점에서, 
그의 정신 자세는 전장에서 승리한 ‘영웅’에 못지않은 이였다. 
역사에서는 그를 다만 ‘참된 선비’로 기록하고 있지만, 
도덕의 시각으로는 인간 승리의 본을 보인 ‘참된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지난날의 선비 중에 떠오른 한 사람이 있다. 별호를 고불(古佛)이라 한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그다. 그에 대한 나의 첫 지식은 조선 초기 방촌(厖村) 황희(黃喜, 1363~1452)와 함께 마치 ‘명재상의 대명사’처럼 들린 것이다.

이어 알려진 그의 태어나게 된 연유 또한 남달랐다는 전설 같은 속설이었다. ‘간밤의 꿈결에 해(太陽)를 삼켰다’는 며느리의 말을 듣자, 곧 급전으로 서울의 아들을 고향 집에 귀가토록 하여 아이를 잉태하도록 한 것이 바로 고불 조부의 조치였다는 내용이다. 그야 떠도는 속설이니 별로 귀담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유학자인 선비가 그의 별호에 ‘부처 뜻’의 글자 ‘불(佛)’을 넣은 점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알아볼 길이 없었다. 그 나름의 사연, 곧 불교와의 어떤 인연이 있었나 추측했을 따름이다. 그렇게 지내던 중, 그에 대한 속설 하나가 더 들려왔다. 고불은 이른바 소년등과(少年登科)로 남다른 재주를 뽐내면서 고위 관직으로 ‘초특급의 출세’ 길에 오른 참이었다. 남모를 자만에 빠질 수 있을 즈음, 한 승려의 뼈대 있는 은유적 교훈에 곧 감화하여, 재빨리 자신을 바로잡았다는 것이다.

내용으로, 그 승려는 찻잔에 물을 넘치도록 부으며 멈추지 않아, 고불이 찻잔이 넘친다고 하자, “허, 이 물처럼 지식만 넘치게 많으면 뭘 하노! 남을 배려(配慮)하고 관용(寬容)할 줄 아는 아량(雅量)이 있어야지!” 고불이 당황해 급히 문밖으로 나가려다가 문틀에 이마를 찧자 승려는 또 “저런! 남에게 고개 숙이는 겸손(謙遜)한 예양(禮讓) 익히는 슬기가 더 먼저라” 했다는 것.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불의 ‘부처 불 글자’는 노숙한 승려의 가르침에 대한 ‘유념의 상징’일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 같다. 어떨까? 나의 짐작이 억지일까? 

일찍이 10여 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7일 동안 굶다시피 했고, 삼년상을 마치기까지 오직 죽만 먹으며 묘막살이를 한 효행으로 해서, 나라에서 이미 효정문(孝旌門)을 세워준 그였다. 그런 그의 재기에 짝한 품성으로는 ‘그 불(佛)자’는 승려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는 ‘자기 경각의 표징’일 개연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문정공 맹사성 정부표준영정 제80호(2008. 2. 4.) 작가 권오창. 사진=고불맹사성기념관 홈페이지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어휘, 변통

고불이 남긴 업적은 권진, 윤회, 신잠 등과 함께 펴낸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가 첫손에 꼽힌다. 그리고 음악을 좋아한 그가 당시 ‘향악(鄕樂)’을 정리한 것도 꼽힌다. 앞 책은 지금 전해오지 않지만, 당시로는 농본국의 정책에 절대적으로 유용했을 작품이라는 가치를 지닌다. 향악 정리는 ‘국악(國樂)의 복원’이라는 의의를 지니는 것이고.

이것들 못지않게 중요한 그의 업적은 또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분별하는 예리한 분별력과 공무 집행에서는 사사로운 이해득실을 넘어 철저히 엄정을 기하려 한 본을 보인 점이다. 그 좋은 사례가 당시 임금(태종)의 사위(趙大臨)가 지은 비리를 알아차리고 고문에 찬 심문(鞫問)하길 주저치 않았던 사실이다. 그로 해서 고불은 태종의 노여움을 크게 샀고, 마침내 파직과 함께 유배의 길을-한주(漢州)로-떠나야 했다. 선비의 ‘대쪽 같은 기개와 실천’을 그에서 확인하게 된다. 얼마 뒤 복직한 그를 이조판서로, 우의정, 좌의정이라는 정승 자리에 앉힌 이는 바로 세종이라는 큰 임금이었다. ‘인물은 인물이라야 알아볼 줄 안다’는 명제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정승으로서도 고불은 오직 ‘봉공(奉公)의 길’만 걸었다. 사생활은 오로지 질박 검약 외에는 아는 것도, 달리 하는 것도 없었다. 변통이란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어휘였다. 당시의 관료는 아무리 고관이라도 대가족으로 생활하기엔 박봉에 지나지 않았다. 고불의 경우, 비가 오면 지붕에서 빗물이 새어들고, 가솔들의 입음새마저 여유롭지 못함을 남들이 알아차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사복 또한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낙천적인 성품만은 구김새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허허실실 오히려 민중들과 동고동락하며 우스갯소리와 농담을 즐겼다.  

그는 간혹 고향인 충남 온양엘 다녀왔다. 소를 탔다고 하지만 나귀나 조랑말을 타고 다닌 듯하다. 어찌했건 서울에서 온양까지 당시는 대체로 이틀 길이었다. 그 도중에서 있었다는 또 하나의 속설이 바로 남루한 그의 차림으로 해서 생긴 이야기이다.

본능적 유혹과 싸워 이겨내었을 따름

듣기로는 평택 근처의 진위라고 들었으나 확실치 않다. 수원 부근일 수도 있다. 그쯤 되는 한 지역의 수령이 하루는 맹정승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양민을 동원하여 길을 깨끗이 닦아놓았다. 칭찬받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기다려도 오지 않던 즈음, 웬 나귀 탄 남루한 선비 하나가 그 길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수령은 아전 등과 완강히 호통을 치면서 통행금지령을 내렸지만, 선비는 한사코 가야겠다는 고집이었다. 그 고집이 수령의 영을 영으로 여기는 기색을 전혀 띠지 않아, 수령의 노기는 갈수록 더해지던 참에야, 마침내 “내가 맹고불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혼비백산한 수령, 아예 입을 막고 숨을 곳을 찾느라 허겁지겁 달아나다, 주머니 속의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 못의 이름이 ‘도장 빠뜨린 못’이라는 뜻, 곧 ‘침인연(沈印淵)’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소탈하기 평민과 다름없던 그, 아니 일반 평민만도 못하게 살던 그였다. 고불이라고 호의호식의 바람이 전무 했을까? 그라고 딸린 식솔에게 일부러 궁핍을 겪도록 했을까? 간혹 뇌물 줄 듯한 청탁이 아예 없기만 했었을까?

본능적 욕구야 남과 다름없었을 그다. 그는 그 본능적 유혹과 싸워 이겨내었을 따름이다.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긴 ‘모범적인 공복(公僕)’이었고, 해서 보기 드문 세종대의 ‘청백리(淸白吏)’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본능적 욕구를 이겨낸 점에서, 그의 정신 자세는 전장에서 승리한 ‘영웅(英雄)’에 못지않은 이였다. 역사에서는 그를 다만 ‘참된 선비(眞儒)’로 기록하고 있지만, 도덕의 시각으로는 인간 승리의 본을 보인 ‘참된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그에 대한 전설 같은 이 실화를 이만 줄인다.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철학 /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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