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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철조사부, ‘권력·공간·학문’이 연출하는 삼중주
만철조사부, ‘권력·공간·학문’이 연출하는 삼중주
  • 박준형
  • 승인 2022.09.13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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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학을 비판한다 ④ 만철조사부

올해로 광복 77주년을 맞이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식민지 근대화론과 좌우 대립 등 이념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연 한국인은 당파 싸움만 하며 전통만 고수하다가 나라를 빼앗겼을까. 이번에 출간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시리즈는 그동안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던 일제 식민사학의 실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대학·언론·박물관·철도주식회사·조선총독부 등은 과연 어떤 식으로 식민사학을 개발해왔는지 알아본다. 

네 번째는 제국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조사부이다. 박준형 서울시립대 교수는 만철조사부가 만주 등지를 무대로 한 조사 활동을 통해 제국 일본 중심의 공간 질서 구축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박 교수는 ‘전후 조선사학’을 이끈 전 만철조사부원 하타다 다카시를 살피고서 학문의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 이형식 고려대 교수는 하타다 다카시가 만철조사부의 ‘지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웠을지 질문을 던진다. 즉, 그에 대한 한계나 문제점 지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전후 조선사학’을 이끈 하타다 다카시는 일본 동양사학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학문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학문의 순수성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 학문의 축적에 기여한 바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대한해협이 있다. 사람들은 양국의 경계가 마치 그 바다의 존재로 인해 원래부터 정해져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경계를 논할 때 자연주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그럼에도 권력은 끊임없이 경계를 자연화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기존 경계를 고착화할 때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계를 확정하려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를 추인하기 위해 역사성을 소거한 단편적 사실들이 제 학문 분야로부터 제공된다.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공간 재편과 만철조사부』의 부제인 ‘권력·공간·학문의 삼중주’는 바로 이와 같은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제국 일본의 국책회사로서 만주 등지를 무대로 무기 대신 붓을 들고 싸운 만철조사부는 권력·공간·학문이 연출해내는 삼중주를 살피기에 더할 나위 없다. 필자는 만철조사부를 제국 일본에 의한 동아시아 공간 재편 과정 속에 자리매김했다. 따라서 이 책의 이야기는 만철 탄생의 배경이 되는 러일전쟁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한반도의 조약체제 편입 및 공간 재편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아이러니의 연속이었다. 제국 일본은 ‘조계(외국인의 거주와 무역을 위한 공간)’를 설치하여 한반도 침략의 단초를 열었으나, 치외법권적 공간의 존재는 어느새 일원적 통치의 장애물로 간주되어 1910년 강제병합과 함께 그를 철폐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만철은 ‘철도부속지’를 통해 만주 지역에서 영역 지배를 실현할 수 있었으나, ‘철도부속지’ 또한 1932년 만주국 설립 이후에는 철폐의 길을 면하지 못했다. 더욱이 특정 지역에 대한 제국 일본의 이름 붙이기는 언제나 그에 부합하는 실체에 앞서고 있었다. 제국의 세력권이 한반도까지 확대되었을 때 ‘만한’·‘만선’·‘만몽’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던 것처럼, 1930년대에는 ‘만몽’ 너머의 땅을 ‘화북’으로 명명하고서는 사후적 협약들을 통해 그를 하나의 실체로서 추인해갔다. 

만철조사부는 학문의 방면으로부터 그 실체 없는 공간들을 추인하는 역할을 했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각각 ‘만선’과 ‘화북’을 대상으로 조사 활동을 벌인 ‘만선역사지리조사부’와 ‘북지경제조사소’이다. 일본 동양사학의 인재양성소라 일컬어지는 전자가 과거에 생산된 역사문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후자는 법사회학적 관점에 입각하여 1940년대 현재의 중국촌락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필자는 이 기관들을 통해 학문이 각 시대의 요구에 어떻게 부응해갔는가를 그려내고자 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양자 모두 ‘있는 그대로’의 역사상 혹은 사회상을 밝히고자 했다는 것이다. 연구자 어느 누구도 역사적 사실이나 사회적 현실의 왜곡을 표방하지는 않았다. 학문적 양심을 저울질할 수 없다면 누가 이 왜곡 여부에 최종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중국 다롄에 있는 만철 본부의 모습이다. 만철은 1907년 4월 도쿄에서 다롄으로 본사를 옮겼다. 사진=박준형

 

만철조사부 활동, 누구를·무엇을 위한 학문인가

1945년 제국 붕괴와 함께 ‘만선’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역사는 그 자취를 감췄다. ‘화북’ 지역 농촌관행조사의 성과물로 간행된 총서 또한 점령 상황에서 획득한 조사 데이터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았다. ‘만선역사지리조사부’를 설립한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학술과 실제의 겸비를 강조했던 것처럼, 순수 학문의 추구 일면에는 그 성과의 정치적 응용이 고려되었고, 따라서 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함께 그에 연루된 학문 또한 지속성을 갖기 어려웠다. 

다만 ‘식민사학’의 전면 부정 혹은 극복을 통해 과거와의 단절이 손쉬웠던 한국 학계와 달리, 전후 일본에서는 근대 이래로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학문의 지층으로부터 순수 학문만을 가려내어 숨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어왔다. 특히 최근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이 컸던 ‘전후 역사학’ 비판의 반대급부로, ‘부(負)의 유산’ 목록에 올라 있던 연구 성과들에까지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그 과정에서 ‘만선사’의 유령이 소환되기도 한다. 

그러나 권력지향적 학문과 순수 학문이 과연 이처럼 정교하게 구분 가능한 것일까. 나는 이 물음을 화두로 삼아 ‘만선역사지리조사부’ 멤버인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의 제자인 동시에, ‘북지경제조사소’ 조사반원으로서 농촌관행조사에도 참여한 하타다 다카시(旗田巍)의 학문적 분투 과정을 추적했다. ‘전후 조선사학’을 이끈 그는 일본 동양사학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학문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학문의 순수성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지만 그의 이력이 보여주듯이 본인 스스로도 제국 학문의 축적에 기여한 바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비판의 화살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과거에 연루된 채로 현재를 살아가는 연구자 자신의 신체성부터 드러내야 했던 것인데, 그와 같은 자기성찰이 전제되어야만 순수 학문의 천착을 넘어 “누구를·무엇을 위한 학문인가”에 답할 수 있다는 게 이 책 나름의 결론이다. 덧붙여 현재가 과거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러한 전제는 비단 ‘식민사학’(혹은 ‘식민사학자’)에만 요구되지는 않을 것이다. 

 

남만주철도의 모습. 박준형 서울시립대 교수는 제국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조사부가 만주 등지를 무대로 한 조사 활동을 통해 제국 일본 중심의 공간 질서 구축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사진=사회평론아카데미

 

 

박준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석사를 거쳐 와세다대에서 한국근대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원구원 연구원,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를 역임했다.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근대편)』, 『서울도시계획사(제1권)』 등을 공동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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