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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5] 기후변화 연구의 선구자 크로포트킨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5] 기후변화 연구의 선구자 크로포트킨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9.0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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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
바진은 1904년 중국 쓰촨성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리야오탕(李堯棠)이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류층의 허례허식과 억압성, 착취 속에 신음하는 하인 등 노동계급의 비참한 삶은 훗날 바진 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사진=위키미디어

루쉰, 라오서 등과 함께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중국의 아나키스트 작가인 바진(巴金, 1904~2005)은 작가가 20대에 심취한 바쿠닌(巴枯寧, 바쿠닝)과 크로포트킨(克鲁泡特金, 커루파오터진)의 이름에서 지은 필명이다. 

바진은 10대부터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는데, 당시 중국인에게 아나키즘은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으로 대변되었음을 그의 이름 짓기에서도 볼 수 있다(이를 한국식으로 고치면 ‘바킨’이 되는데, 나는 크로포트킨의 ‘킨’이 아니라 ‘크’를 따 Bak라고 쓰고 ‘박’이라고 자신의 성을 표기해본 적이 있다. 그 뒤 여권을 처음 만들 때 관청의 공무원이 ‘박’이라는 성은 Park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Bak를 포기한 것을 지금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바쿠닌보다는 크로포트킨이 훨씬 가깝게 여겨진다. 이는 내가 아나키즘으로 이해하는 3자주의(자유-자치-자연)에서 바쿠닌은 자연에 대한 고찰을 거의 하지 않은 반면, 크로포트킨은 가장 완전하게 3자주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이크 데이비스, 크로포트킨 생태주의를 발견하다

나는 2021년 9월에 『표트르 크로포트킨 평전』을 냈다. 그 직후 우연히 2020년 12월에 나온 마이크 데이비스의 『인류세 시대의 마르크스』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 책에서 데이비스는 크로포트킨을 “자연적 기후변화를 인류 역사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인식한 최초의 과학자”(20쪽)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전에도 그런 경험을 했다. 가령 하버드대의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나 현대 미국의 페미니스트인 레베카 솔닛이 자신들의 사상을 설명하면서 크로포트킨을 인용하는 것을 읽었을 때였다. 크로포트킨은 다른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여러 현대의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재조명되는데, 이번에도 그런 놀라움을 경험했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사회운동가이자 도시사회학자, 역사가다. 그는 스스로를 “맑스주의 환경론자”라 칭한다. 사진=위키미디어

데이비스에 의하면 “19세기에는 특히 삼림 파괴와 산업공해 같은 인간 활동이 기후 변화를 가져와 농경은 물론 심지어 인간 생존마저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이 식자층의 여론에 광범위하게 통용되었다.” 크로포트킨은 시베리아에서 사막화 현상을 연구하며 유라시아 내륙이 장기간에 걸쳐 오랜 건조화 과정을 지나왔다는 ‘건조화 가설’을 제기했다. 이는 인간의 행위와 기후변화의 연관성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들 가운데 하나라고 데이비스는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크로포트킨은 1904년에 쓴 논문에서 “빙하기의 종결은 여전히 진행 중인 과정이고, 그 결과 점진적인 건조화 효과를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 볼 수 있으며, 이것이 유럽에 대한 아시아 유목민들의 간헐적인 맹습 같은 일련의 재앙적 사건들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20-21쪽) 

데이비스가 말한 크로포트킨의 논문은 1998년에야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다른 언어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그런데 크로포트킨의 연구는 그의 아나키즘 사상과 마찬가지로 무시되고 심지어 왜곡되었다. 즉, 크로포트킨의 연구는 지리학자인 엘즈워스 헌팅턴 같은 사람들에 의해 주기적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로 통속화되고 심지어 괴상한 과학적 인종주의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역사기후학이라는 중요한 학문 분야가 오랫동안 과학계와 역사학계 양쪽 모두로부터 외면 받았다.(262~263쪽) 데이비스는 그 여파로 오늘날 인류는 인류세에 들어선 이후에도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지적·윤리적 진공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다가 2018년에 와서야 크로포트킨의 연구에 대한 논문들이 나옴으로써 생태학자 크로포트킨이 재발견되었다. 

여하튼 데이비스도 지적했듯이 크로포트킨은 이미 생전에 도시와 농촌의 균형을 포함한 에콜로지적 문명 대안을 전개했고 이는 패트릭 게데스(Patrick Gedes) 등의 업적으로 이어졌다. 데이비스는 “도시생활의 평등주의적 측면이야말로 자원 보존과 탄소 배출 완화에 필요한 최상의 사회적·물리적 자원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한다.(291쪽) 나는 『표트르 크로포트킨 평전』에서 이미 그 점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다. 흔히 크로포트킨은 과학적 아나키스트라고 하면서 혁명적 아나키스트인 바쿠닌을 비롯한 크로포트킨 이전의 아나키스트들과 비교한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 변증법을 비판하고 과학(귀납적 방법론)에 근거한 아나키즘을 수립한 점은 그의 중요한 공헌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에콜로지의 강조였다고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그 점에서 그는 뒤에서 보는 윌리엄 모리스와도 통한다. 그 두 사람이야말로 내가 아나키즘을 자유로운 개인과 그들이 자치하는 사회에 그치지 않고(고드읜이나 프루동이나 바쿠닌의 아나키즘), 자연과의 조화라는 점을 더하여 자유-자치-자연이라는 삼자주의로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뒤에서 보는 간디와 북친은 그런 점에서 크로포트킨의 제자들이다.      

크로포트킨, 적자생존에 맞서 사회협력론을 내놓다

크로포트킨은 상호협력에 근거한 건전한 아나키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여기서 19세기 자연과학의 업적을 참조하면서 아나키즘이 형이상학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형이하학적(자연과학적) 자연과학에 근거해야 한다고 크로포트킨이 주장한 점을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내가 『표트르 크로포트킨 평전』에서도 강조한 바이지만, 크로포트킨은 바쿠닌이나 슈티르너, 심지어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근거한 변증법적 방법론이 자연과학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나아가 자연과학적 연구에 근거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연과학과는 무관한 형이상학적 선전물에 그치는 경우도 있음을 크로포트킨은 주목한다. 그것이 바로 다윈의 진화론을 빙자하여 그 이론이 사회과학에도 먹히는 것으로 조작하여 적자생존이나 승자독식의 불평등을 합리화하여 제국주의 침략이나 자본주의 내 착취를 정당화한 헉슬리 류의 사회진화론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에 기대어있을 뿐인 비과학적 형이상학에 불과하다. 그것과 대결하기 위해 크로포트킨이 사회협력론을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의 역사적이고도 현실적인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아가 정치적 및 사회적 차원에서도 과학에 근거한 아나키즘이야말로 제국주의 침략과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하여 인민을 보호하고 인권을 지킬 수 있는 객관적 근거로 만들 수 있었다. 

1901년 러시아어로 처음 출판된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에서,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와 같은 아나키즘이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는 아나키즘은 모든 현상에 대한 기계적 설명에 기초한 세계 개념으로 자연 전체를 포용한다. 즉, 인간 사회의 삶과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문제를 포함한다. 그것의 조사 방법은 정확한 자연과학의 방법이며, 만약 그것이 과학적이고자 한다면, 모든 결론은 모든 과학적 결론이 확인되는 방법으로 판명돼야한다. 그것의 목표는 자연의 모든 현상, 따라서 사회의 삶을 하나의 일반화로 이해하는 종합 철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움직임이 아나키즘적 이상을 향한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크로포트킨은 진보를 가져오기 위해 스펜서와 콩트의 과학에 대한 실증적 신념을 공유했지만, 그는 또한 과학적 사고 방법을 교육, 도덕 및 정치 영역으로 확장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크로포트킨의 과학 중시는 앞에서 본 바쿠닌의 과학 경시에 대한 반발로도 보이지만, 아나키스트 중에는 그의 과학 중시를, 아나키즘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적 무기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과학 중시에 의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말라테스타와 같은 사람도 있음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 

여성·인종·아동에 관심을 기울인 마이크 데이비스

윌리엄 모리스는 영국의 디자이너이자 시인, 소설가, 번역가, 사회주의자이다. 당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과 맞물려 영국 전통의 직물 예술과 생산방식을 부활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사진=위키미디어

위에서 소개한 마이크 데이비스는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아나키즘에 상당히 기울어져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측면만이 아니다. 그는 “노동운동의 목표를 단순히 분배적 정의나 수입의 공평, 혹은 번영의 공유로만 설정하면 전환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200쪽)고 하면서  여성, 인종, 아동과 같은 공공의 사안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무시한 반면 바쿠닌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주목하며 비공식 프롤레타리아들의 협력과 공공의 삶이야말로 불평등과 생태위기를 극복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크로포트킨이나 윌리엄 모리스나 패트릭 게데스나 루이스 멈퍼드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주목한 새로운 도시를 통한 개혁이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의 견해는 마르크스주의를 아나키즘으로 재흥하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뒤에서 보듯이 데이비스는 크로포트킨의 도시와 농촌 간의 협동이나 상호협력에 대한 주장을 중시하지는 않아 유감이다. 여기서 데이비스가 아나키즘의 핵심인 국가 부정에는 찬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를 아나키스트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는 국가를 완전히 거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폐해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것이 존재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 아나키스트 중에는 제임스 스코트와 같이 국가의 최소한 기능을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는 시점의 공상적 과학주의utopian scientism에 입각한 주류 아나키즘을 거부하는 대신 가족이나 학교를 비롯한 일상의 삶을 아나키즘의 입장에서 재구성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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