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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나침반
고장 난 나침반
  • 신희선
  • 승인 2022.08.29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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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신희선 숙명여대 교수

“특권을 누리는 이와 고통을 받는 이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것이 중요하다. 미국 펜클럽 회장을 지낸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에서 다른 이들의 참상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직접 고통을 경험해보지 않고도 그 아픔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동체에서 혼자 존재할 수 있는 리더는 없다. 함께 하는 사람들의 처지와 상황을 헤아려야 하는 것은 리더의 숙명이다. 폭우와 폭염으로 점철된 8월을 보내며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고장 난 나침반을 보는듯한 장면들을 보며 역사를 생각한다.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수해 현장에 자원봉사를 한다고 나갔던 국민의힘 의원이 원내대표와 동료 의원과 가볍게 떠들다 했던 발언이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사진에 찍혀야만 국민들을 위해 열일하는 국회의원으로 보여질 수 있기에 보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던 것일까. 말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설득하고 감동을 주는 것이 리더십의 본질이건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실의 홍보용 카드뉴스도 논란에 휩싸였다. “집중호우 침수 피해지역 현장점검-국민 안전이 최우선입니다”라는 제목으로, 갑자기 불어난 폭우로 신림동 반지하 주택이 침수되어 일가족이 참변을 당한 현장에, 민방위복 차림을 한 대통령이 쭈그려 앉아 반지하 창문을 내려다보는 사진을 게재했다가 삭제하였다. 가장 취약한 계층의 생활을 살피는 것이 기본 임무임에도 재난상황조차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수전 손택은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고 지적하였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뉴스는 오락이 되었다. 재난과 재해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구경거리로 만들고, 처참한 현장을 정치적 선전을 위한 배경으로 삼는 이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 정치가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

더구나 역사를 써가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이미지로 뒤덮인 세계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점점 마비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기레기’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 회자되고 있다.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다루지 않거나, 허접하고 자극적인 기사만 양산하는 기자들을 조롱하는 표현이다. 국민 5명 중에 4명은 뉴스를 불신한다고 할 정도로 한국의 언론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지금의 대학도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대학의 도는 ‘명명덕(明明德)’에 있다고 했는데, 도덕적 실천과 올바른 원칙을 지켜가지 못하고 대학이 권력과 자본에 굴종해 타락하고 있다. 명백한 위조와 표절에 대해서도 천박한 논리로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납득할 수 있도록 진실을 밝혀야 함에도 왜곡된 지식이 유통되는 것을 방조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대학은 죽었다”고 탄식한다. 대학이 연구 윤리에 입각한 검증을 외면하니, 학위장사를 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대학의 본질인 학문과 연구, 교육이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는 위험한 형국이다. 교육 철학의 빈곤과 역사의식의 부재로 대학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있는 지금, 미래 세대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 엄중히 물을 일이다.

카아(E. H. Carr)는 역사가의 역할은 나침반과 같다고 하였다.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에게 미래를 위한 방향 감각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현재의 역사가가 선택한 사실이 미래에도 중요한 가치가 있고 부끄럽지 않은 해석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이고 ‘상식’인지 뒤틀린 지금, 각자 자신의 프레임 안에서 특정 사실을 진실인양 강변하고 있다. 진영 논리가 사안을 해석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언론과 대학 본연의 역할이 중요하다. 은폐된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문제의식을 벼리어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용기 있게 원칙을 말할 수 있는 책임 있는 길잡이 역할이 그것이다. 

이미 고장이 난 나침반을 들고 애써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길 바라며, 이제라도 제 사명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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