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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4] 근대 혁명의 예언자는 마르크스 아닌 바쿠닌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4] 근대 혁명의 예언자는 마르크스 아닌 바쿠닌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8.2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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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닌의 평가와 영향
바쿠닌은 의회 정치를 거부하고 국가의 즉각적인 파괴를 요구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역사에 가장 뚜렷하게 남은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바쿠닌의 비판이다.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역사적 논쟁은 바쿠닌과 마르크스의 차이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은 둘 다 역사적 유물론을 채택하고 계급투쟁을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받아들였으며 역사의 목표를 자유롭고 자유로운 평등한 사회로 보았다. 그들은 둘 다 생산 수단의 집단적 소유권을 원했다.

그들의 주요 차이점은 전략에 있었다. 바쿠닌은 의회 정치를 거부하고 국가의 즉각적인 파괴를 요구했으며 노동자와 농민이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의 자유로운 조직화’에 대한 바쿠닌의 믿음을 “넌센스”라고 일축했다.

마르크스가 농민을 시골의 바보로,를 벼락치기로 멸시한 반면, 바쿠닌은 그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인정했다. 정치 권력의 정복에 대한 마르크스의 요구에 대해 바쿠닌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해방을 주장했다. 바쿠닌은 혁명을 가져오는 데 있어 인민의 자발적 의지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스의 결정론을 더욱 누그러뜨렸다.

평등을 주장했지만 인종차별주의자였던

마라크스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설명한 바쿠닌의 생각에 대해 '넌센스'라고 일축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이론적 차이를 넘어 바쿠닌과 마르크스는 서로 다른 세계관의 상징이 되었다. 바쿠닌은 관대하고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정신’의 화신으로 '변덕스러운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의 기초를 닦도록 부름을 받은 가장 위대한 천재들의 성가시고 야만적인 에너지를 가졌다. 그리고 모든 격렬한 기이함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친구들에게 친절하고 사려 깊고 온유했다.  

그러나 바쿠닌은 모든 인류의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독일인과 유대인을 권위주의자로, 슬라브인을 자발적이고 자유를 사랑하는 것으로 볼 만큼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이었다. 절대적 자유에 대한 그의 요구는 그의 비밀 조직에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통제하려는 권위주의적 욕망과 공존한다. 사회적 조화와 평화에 대한 그의 웅변적 옹호는 ‘사악한 정욕’, ‘피와 불’, ‘완전한 전멸’, ‘파괴의 폭풍’, ‘맹렬한 눈사태, 삼키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등의 맹렬한 축하와 일치한다. 폭력 그 자체를 위한 미덕에 대한 믿음과 ‘테러 기술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그의 ‘파괴의 시’를 찬양하는 데에는 불길한 요소가 있다. 

보이지 않는 독재에 대한 바쿠닌의 요구와 비밀 결사 및 소규모 전위 무장 세력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불가피하게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는 그의 인식과 ‘절대적 자유’를 달성하기 위해 독재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인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열렬한 진리 추구자’와 ‘광신적인 자유의 연인’이 이성적인 논쟁보다는 위장과 사기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그의 개인적 진정성과 도덕적 모범을 훼손한다. 그가 마르크스의 혁명적 독재에서 묘사한 위험이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는 실패자였다. 

농민의 가능성과 관료제의 도래를 예견하다

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유랑적인 극빈층을 가리킨다. 사진=위키미디어
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유랑적인 극빈층을 가리킨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쿠닌은 국제적 용어로 사회 혁명을 설교한 최초의 러시아인이었다. 국가에 대한 분석에서 그는 관료제를 현대적 분업의 불가피한 결과로 본 막스 베버(Max Weber)와 ‘과두제의 철칙’을 주장하는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를 예견했으며, 엘리트는 모든 정치 조직에서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농민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그의 강조는 20세기 러시아, 스페인, 중국, 쿠바의 모든 주요 혁명에 의해 확인되었다. 

나아가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신좌파 이데올로기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과학과 과학 엘리트의 권위주의적 위험에 대한 그의 비판은 프랑크푸르트학파, 특히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1968년 파리에서 일어난 반란 동안 ‘파괴하려는 충동은 창조적 충동이다’와 같은 바쿠닌주의적 슬로건이 도시 벽에 다시 나타났다. 근대 혁명의 진정한 예언자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바쿠닌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바쿠닌의 가장 좋은 이미지는 교회와 국가의 유혈 전복을 요구하는 바리케이드 위의 혁명이 아니라 자치 코뮌의 자발적인 연합을 기반으로 한 자유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주장을 정교하게 만든 통찰력 있는 사상가다. 그의 역사적 중요성은 19세기 후반에 노동계급 운동 사이에 아나키즘 사상을 퍼뜨리는 데 기여한 점이다.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의 영향력은 아나키즘이 20세기에도 노동 운동에서 지배적이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영향력이 되도록 했다. 스페인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는 바쿠닌의 땅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란츠 파농·체 게바라, ‘바쿠닌’이라 불리다

프란츠 파농은 평생을 인종차별과 식민주의에 맞서 싸웠던 프랑스 국적의 정신과 의사다. 사진=위키미디어

2차 세계대전 이후 바쿠닌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1960년대 학생 운동뿐만 아니라 놈 촘스키와 같은 학계의 전문가들에게서도 새로워졌다. 촘스키는 1865년에 바쿠닌이 사회혁명에서 빠질 수 없는 한 가지 요소가 “젊은이들의 지성과 고결함이 될 것이다. 비록 특권계층의 타고난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런 성향 때문에 젊은이들은 고결한 확신과 열정을 품고 민중의 주장을 따르게 된다”고 한 것이 1960년대 학생운동을 예언한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자발성에 대한 바쿠닌의 숭배, 혁명적 승리와 본능적 반항에 대한 강조, 노동자 통제에 대한 옹호, 사람들의 창조적 에너지에 대한 믿음, 과학에 대한 비판 등은 현대 기술 국가의 반항적인 젊은이들에게 어필했다.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에서 제국주의에 저항한 20세기 바쿠닌의 현현으로 찬양되었다. 체 게바라조차 ‘새로운 바쿠닌’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분열된 사회에서 전체성을 추구하는 바쿠닌은 단순히 병든 형태의 낭만주의나 불균형한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소외된 세계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대담하고 고무적인 시도다.

한편 아나키즘 사상사에서 바쿠닌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슈티르너와 대립되는 사회적 아나키스트 내지 혁명적 아나키스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바쿠닌은 마르크스와 함께 헤겔의 영향을 받았는데 헤겔의 영향이라는 점에서는 슈티르너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변증법에 근거한 부정정신을 강조한 점도 바쿠닌이 슈티르너와 공유하는 점이다. 그러나 슈티르너의 부정은 개인적 자아를 해방하는 사변적이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변증법적 사유 안에 머무는 것인 반면, 바쿠닌은 개인적 자아가 아니라 사회적 자아, 즉 인간 집단을 생의 창조적 자발성 안에 다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슈티르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독한 자아를 위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하는 담론에서 해방시키고 신이나 인간이라는 망령을 일소하고 자아를 유일자로 세우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슈티르너는 자기 중심의 자유가 중요하다. 반면 바쿠닌에게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가 중요하다. 그 점에서 두 사람은 다르지만, 둘 다 신이 아닌 인간을 최상위에 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바쿠닌의 이름으로 테러가 행해지다

헤이마켓 사건은 1886년 5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시의 헤이마켓 시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진행되던 노동시위 와중에 벌어진 폭탄투척 사건과 그 결가 일어난 폭력사태다. 사진=위키미디어
헤이마켓 사건은 1886년 5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시의 헤이마켓 시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진행되던 노동시위 와중에 벌어진 폭탄투척 사건과 그 결가 일어난 폭력사태다. 사진=위키미디어

바쿠닌의 행동적 아나키즘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 가령 스위스의 기욤과 쥐라 연맹, 러시아의 네챠예프와 체르게조프, 이탈리아의 말라테스타와 카피로 및 코스타, 프랑스의 르클뤼와 블루스, 그리고 독일의 요한 모스트 등이었다. 특히 19세기 말의 테러리즘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바쿠닌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프랑스의 라바숄이나 바이양 같이 순하게 사상을 동기로 한 테러리스트도 있었지만, 미국에서 대통령 맥킨리를 살해한 졸고스처럼 개인적인 허영심에서 비롯된 테러리스트도 있었고, 메이데이의 기원으로 알려진 헤이마켓 사건처럼 정부의 음모에 의한 경우도 있었다. 

헤이마켓의 순교자들인 파슨즈 등은 아나키스트들로 8시간 노동제의 확보를 위해 투쟁했다. 그들의 집회를 경찰들이 습격하여 방해한 결과 사상자들이 다수 나오자 노동자들이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집회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폭탄이 터져 경찰관 6명이 죽는 사건이 터졌다. 정부는 폭탄 투하가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것이라고 속단하고 충분한 심리도 없이 5명을 사형(1명은 옥중에서 자살)시키고 나머지 3명은 장기형에 처했다. 그러나 7년 뒤 일리노이 주 지사는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헤이마켓 사건 이후 테러리즘은 아나키즘 운동사에서 서서히 그 의의를 잃어갔다. 그것은 1881년 런던 아나키스트대회에서 테러리즘을 전술로 채택하는 것에 반대한 크로포트킨의 목소리가 커졌음을 의미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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