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6:20 (토)
표절과 대학의 존재 이유
표절과 대학의 존재 이유
  • 안상준
  • 승인 2022.08.30 0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정론_ 안상준 논설위원 / 국립대안동대 사학과 교수

 

안상준 논설위원

Homer, Herodotus, Sophocles, Plato, Aristotle, Demosthenes, Cicero, Vergil. 미국 컬럼비아대의 중앙도서관(Butler Library) 정면에 새긴 고대 그리스 로마의 작가, 역사가, 철학자, 정치가의 이름이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인문학자로서 필자는 이 명단을 직접 보면서 서양의 지적 전통을 잇는 지식인을 배출하려는 대학의 사명을 읽어냈다.

명성에 걸맞게 이 대학은 테오도어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 버락 오바마 등 미국 대통령과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전설적인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아가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출입자를 맞이하는 철학과 건물에서 위와 같은 인물을 배출한 대학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머무는 동안에 우리 사회와 학계에도 알려진 이 대학의 교수가 표절 시비에 걸려 진상조사를 받는 중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나는 큰 충격에 빠졌고, 진상조사의 결과에 자연히 관심이 갔다. 지인에게 수소문했으나 워낙 신중한 사안이라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고 몇 년 지나 국내 언론에 이 사안에 관한 기사가 났다.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컬럼비아대의 연구 부정행위에 관한 방침과 절차에 따라 ○○○교수의 저서에서 표절이 확인되었고, 해당 교수는 강의와 학생지도에서 배제되었다. 대학 당국은 이런 결론을 학내 모든 교수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경향신문, 2019. 9. 18). 필자에게는 대학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는 대학 당국의 단호한 결정으로 보였다.

모든 연구자와 학자는 양심을 걸고 저서와 논문을 작성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러나 모든 법칙에 예외가 있듯 표절 등 연구 부정행위는 일어나고 관련 법규에 따라 처벌한다. 컬럼비아대 사례처럼 진상조사를 거쳐 불명예 퇴진하는 교수도 있지만, 원저자로부터 표절 항의를 받은 교수가 대학당국에 자진 신고하여 징계를 받거나 아예 대학교수의 직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기관과 당국이 의지를 갖고 자정 기능을 발휘하면 연구자와 학자 전체에게 경종을 울리는 효과도 내고 대학과 연구자가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일은 결코 없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다. 이제는 교육부 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박순애 교수는 왜 그다지도 장관직에 애착을 보였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음주운전, 입시컨설팅 등 여러 의혹보다도 표절로 두 차례나 학회의 경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 사안을 통해서 그런 징계를 처음 인지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양심과 양식의 문제를 외면하고 사회적으로는 공정과 상식이 작동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로 길이 남게 되었다.

또한, 컬럼비아대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대학이 있어 우리 사회는 지금 홍역을 치르고 있다. 언론에 노출된 기사와 피해 당사자의 항변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연구 부정행위가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이를 감추려는 대학의 처신과 꼼수는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미 지난해 가을에 이 사안에 대한 그 대학 교수회의 적절한 대응이 있었더라면 이토록 위중한 사안으로 커지지 않을 터여서 더욱 아쉽다. 만시지탄이지만 하루속히 대학 당국이 왜곡된 처사를 인정하고 대학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로 가야 한다.

차제에 우리 대학도 학위 논문 작성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부정행위를 방지하는 장치와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필자의 경험을 소개하자면,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겠다고 역사학부 사무실에 알리자 직원은 내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자세히 읽어보니 제출자가 이 논문을 직접 작성했는지 확인하는 서약서였다. 학위 논문 대필을 상상하지 못하던 시절에 당혹스럽고 어색했던 그 순간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런데 그 서약서는 연구 부정행위를 묻는 엄격한 출발점이자 대학 당국이 학위를 부여하는 근거가 되는 문서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대학은 고급지식을 생산하고 보급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지적 산물에 권위를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기관임을 되새겨야 한다. 대학이 지적 권위를 상실할 때, 우리 사회의 타락이 심히 우려스럽다.

안상준 논설위원
국립대안동대 사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