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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3] 국가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박해하며 착취하고 타락시킨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3] 국가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박해하며 착취하고 타락시킨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8.22 0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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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닌의 자유사회
바쿠닌은 러시아의 농민공동체인 미르에 대해 비판적었다. 사진=위키미디어

바쿠닌은 미래의 자유 사회에 대해서는 자발적 결사와 자유 연합이라는 가장 일반적인 원칙만을 설명했다. 미래의 사회 조직은 아래에서 위로, 자유로운 결사에 의해, 그리고 코뮌, 지역, 국가, 마지막으로 거대한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연맹이 되고, 토지는 농업 협회와 자본에 의해, 생산 수단은 산업 협회에 의해 점유된다고 보았다.

바쿠닌은 새로운 코뮌이 기존의 농촌 코뮌과 다르다고 했다. 특히 러시아의 미르(농민 공동체)에 대해 바쿠닌은 비판적이었다. 러시아 농민들이 토지가 공동체에 속하고 국가에 적대적이라고 느꼈지만, 가부장제 전통에서 따온 차르에 대한 신뢰로 개인을 지역사회에 흡수함으로써 가부장주의에 의해 약화되어 가족 가부장을 노예와 독재자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반면 해방된 사회에서 새로운 코뮌은 자유롭고 평등한 남녀의 자발적인 결사로 구성된다. 자신의 아나키스트 원칙을 인류의 절반에게만 확장한 프루동과 달리 바쿠닌은 여성의 완전한 해방과 남성과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했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경제적, 사회적 평등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이성의 권위 외에는 어떤 권위에도 맡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자유롭다.

그들은 자유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따라서 자유는 연대의 발전을 포함한다. 사회주의는 정의이고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은 모든 인간이 인간성을 계발할 물질적, 도덕적 수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는 도덕적 사회가 된다. 

사회주의에서는 인간관계도 변한다. 가부장제, 혼인법, 상속권의 폐지로 남녀는 이전보다 더욱 밀접하게 결합된 자유로운 결합 속에서 살게 된다.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은 어머니에게 맡겨지지만 주로 사회의 관심사로 남는다. 실로 완전한 만인을 위한 평등한 교육은 인류 해방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러한 교육 시스템은 기존의 차이를 근절할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아동이 사상과 노동의 삶을 살도록 준비시키고 사회주의 도덕성을 흡수하며 최고의 의무인 타인의 자유 존중을 장려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교육을 받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

 

여론의 압력이 ‘기생충’을 불가능하게 하는 세상

바쿠닌은 테러는 진정한 사회혁명이 아니라고 봤다. 사진=위키미디어

바쿠닌은 이 같은 사회주의에 의해 모든 사람이 일하고, 좋든 싫든 교육을 받아야 하는 법을 제시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정치적 권리는 오직 하나의 기초, 즉 모든 사람이 기여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실정법의 사용 없이 여론의 압력이 '기생충'을 불가능하게 해야 하지만, 게으름의 예외적인 경우는 임상 치료를 받아야 하는 특수 질병으로 간주된다. 

자유사회에 이르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고 바쿠닌은 주장했지만, 테러리즘은 진정한 사회 혁명이 아니라고 하면서 파업과 같은 경제 투쟁을 권장했다. 그는 노동자협동조합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사회를 바꿀 수 없고, 거대자본과 경쟁할 수 없으며, 성공하면 물가뿐 아니라 임금도 하락하게 된다고 했다. 변화의 주체와 관련하여 바쿠닌은 농민과 산업 노동자 간의 동맹을 일관되게 요구했다. 비록 도시노동자들이 혁명운동에 앞장서게 될지라도 농민의 혁명적 잠재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지지를 얻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가 참여한 1870년 리옹 봉기의 실패는 사회 혁명의 승리에 대해 거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했지만, 1871년 파리 코뮌은 그의 희망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켰다. 대다수가 혁명적 정부와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요구하는 자코뱅파였지만, 프루동주의자도 있었고 20구 위원회와 방위군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활동적인 구성원은 바쿠닌의 추종자들이었다. 바쿠닌은 파리 코뮌을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국가에 대한 대담하고 분명하게 공식화된 부정'이라고 하고 그 패배를 ‘유럽의 연합된 국제적 반동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인류 그 자체’라고 했다.

또 마치니가 반민족주의라는 이유로 인터내셔널을 공격하고 코뮌이 무신론이라고 비난하며 국가는 신이 제정한 것이라고 선언하자 바쿠닌은 즉시 펜을 들고 마치니에 반대하는 수백 페이지를 썼다. 바쿠닌은 마치니를 '절대적으로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인물'로 존경하고 그를 마르크스보다 좋아했지만 ‘구식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정치적 이상주의의 마지막 대제사장’이라고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에서 ‘생산자들의 자치’를 보고 그것을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실현될 수 있도록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로 묘사했다. 엥겔스는 그것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시위라고 불렀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모두가 파리 코뮌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모델로 환영했지만, 국가의 기계를 일격에 폐지하려는 시도는 분명히 프루동과 바쿠닌의 아나키즘 및 연방주의 사상에 더 부합했다.

 

파리 코뮌의 패배와 마르크스의 독재

코뮌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찬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바쿠닌 사이에 새로운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파리 코뮌의 패배로 1871년 파리에서 대회가 열리지 않고, 런던에서 열린 대회에는 바쿠닌 지지자들이 초청되지 않았다. 그 결과 마르크스의 개인 독재가 수립되고 인터내셔널은 자신이 수장인 거대하고 괴물 같은 국가로 변형되었다. 

파리코민의 패배로 파리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마지막 전투는 1872년 9월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 벌어졌다. 처음으로 직접 참석한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바쿠닌의 지시로 비밀 결사체가 조직되었고 그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동맹 그룹을 통제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바쿠닌과 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인 기욤 등이 인터내셔널에서 추방되었다. 그후 본부는 비마르크스주의자 다수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뉴욕으로 옮겼지만 곧 무너졌다. 아나키스트들은 1872년 스위스의 생 이미에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경제 투쟁에만 전념하는 완전히 자치적인 민족 그룹의 느슨한 연합으로 설립했다.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 내부의 초기 논쟁에서 승리했지만, 이후의 사건들은 중앙집권주의, 국가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바쿠닌의 경고가 타당했을 보여주었다. 그는 공산주의 국가의 본질에 대해 예언적인 통찰을 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대부분 스스로 임명되고 자기 재생산적인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며 중앙집권화되고 관료적이며 군국주의가 된다. 1980년대 동유럽의 일련의 마르크스주의 정권은 인민의지의 대규모 과시로 전복되었고, 구소련의 진보세력은 느슨한 독립 공화국 연방을 요구하였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바쿠닌이 역사의 평결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물론 바쿠닌은 레닌처럼 폭력적 혁명을 요구했고 자신이 통제하는 비밀 전위에 대한 믿음을 공유했으며, 레닌은 네차예프를 가장 위대한 혁명가라고 예찬했다는 점에서 바쿠닌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바쿠닌이 공산주의에는 철저히 반대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가 공산주의를 부정한 이유는 그것이 자유를 부정하기 때문이었다. 자유 없이 인간성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바쿠닌은 말했다.

또한, 공산주의는 모든 사회적 힘을 국가의 이익을 위해 집중하고, 그것은 국가에게 재산을 집중시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바쿠닌은 국가를 폐지하고, 국가에 고유한 권위와 편애의 원리를 근절하고자 했다. 국가는 지금까지 인간의 도덕화나 문명화를 유일한 구실로 삼아 인간을 노예화하고 박해하고 착취하고 타락시킬 수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어떤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자유연합이라는 방법에 의해 조직된 사회와 집산체나 사회적 소유를 그는 구상했다. 국가의 폐지와 함께 사적 상속재산의 폐지를 바쿠닌은 요구했다. 그것은 국가제도 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 국가 원리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바쿠닌은 주장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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