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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페미야?
엄마도 페미야?
  • 최승우
  • 승인 2022.08.14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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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24쪽

이대남 신드롬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젠더 갈등을 악화시키는 정치적 이해관계”

김재련 변호사는 중 2 아들이 “엄마 페미니스트야? 페미들은 왜 남자를 조롱하고 미워해? 심지어 길에 쓰러진 여자를 도와줘도 성희롱 했다고 고소한다잖아”라고 물었다고 한다. 우석훈 경제학자는 “엄마도 페미야?”라고 따지듯 묻는 어린 아들 때문에 우는 엄마를 보았다고 말한다. 또 어느 40대 엄마가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중 2 아들이 “엄마도 페미야?”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렇게 페미니즘에 대한 갈등은 가정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10대들이 커서 20대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바와 같다. 다시 말해 ‘이대남·이대녀 현상’의 뿌리는 상당 부분 초등학교 시절부터 경험한 페미니즘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사회에 남녀, 특히 이대남과 이대녀의 젠더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2022년 3월 대선에서 20대 남녀는 윤석열과 이재명에 대한 지지 성향이 달랐는데, 20대 남성은 국민의힘 우세가 더 커졌고 여성은 민주당 우세가 더 커졌다. 2022년 6월 지방선거의 지상파 방송 3사 출구 조사에서 이대남과 이대녀의 표심(票心) 균열 현상이 더 심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유권자 성·연령별로 전국 광역단체장의 국민의힘과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가 20대 남성(65.1퍼센트 대 32.9퍼센트)과 20대 여성(30.0퍼센트 대 66.8퍼센트)이 크게 달랐다. 서울시장 선거 출구 조사에서도 이대남은 국민의힘 후보 오세훈에게, 이대녀는 민주당 후보 송영길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강준만의 『엄마도 페미야?: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의 소통을 위하여』는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에 소통이 없고, 때로는 젠더 갈등이 세대 갈등마저 집어삼키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아니 비판만 받을 게 뻔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젊은 남성들의 ‘반(反)페미’ 정서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비난을 하는 걸로 대처하는 페미니즘 진영의 안이한 대응 방식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는 얼마든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구조와 개인은 혈투를 벌여야 할 관계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의 주제인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은 상당 부분 ‘공감의 게임’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건 이 갈등들엔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에 대한 지극한 공감과 사랑은 그것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악마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소통 없는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에 소통의 싹이나마 틔우기 위해서라도 ‘다정한 편파성’보다는 ‘냉정한 공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정한 편파성을 양산해내는 부족주의에서 탈출하고, 증오를 위한 공감보다는 증오가 없는 냉정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이 뜨거웠던 이유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국제 통계는 매년 몇 차례씩 보도된다. 특히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하는 세계 ‘성 격차 지수’에서 한국은 늘 하위권에 갇혀 있다. 이 통계의 핵심적인 문제는 의도적인 페미니즘 가치 지향성과 ‘유럽 중심주의’다. 문화와 사회 발전 정도가 비교적 동질적인 유럽에서는 쓸모 있는 통계일 수 있다. 물론 한국처럼 높이 올라갈수록 남성이 대부분 해먹는 나라에서는 세계경제포럼 통계가 변화의 자극을 주는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수 여성은 믿을망정, 다수 남성은 믿지 않고, 이대남은 엉터리라고 비웃거나 욕하는 통계로 무슨 바람직한 변화가 가능하겠는가? 더구나 이런 통계가 이대남의 정치적·사회적 성향에 대한 뜨거운 논란, 즉 ‘이대남 신드롬’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부추기는 용도로 소비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2년 1월 7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 윤석열은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단 한 줄의 문구를 게시했다. 이 게시물은 1시간도 안 되어 1,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는 등 뜨거운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찬반 양쪽은 모두 격렬하게 싸웠다. 그런데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더라도 여성가족부가 수행해온 일들의 대부분은 폐지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름만 바꾼 다른 부서를 만들거나 하는 수준으로 끝날 게 뻔한데, 왜 양쪽 모두 목숨을 건 것처럼 이 문제에 매달렸던 걸까? 이것이 바로 인정 투쟁이라는 상징 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여성가족부를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여겨온 페미니스트들도 상징의 훼손에 더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이대남도 여성가족부 폐지를 ‘인정 투쟁’의 문제로 여겼다. 그들은 “이대남은 어떤 존재로 인식되는가. 보호의 대상인가, 아니면 걸림돌과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회피의 대상인가, 그것도 아니면 저주와 파괴의 대상인가?”(정여근)라고 묻는다. 그동안 여성가족부는 “여성들의 채권자 의식이 너무 과잉되었”고, “폭력 예방 교육에서 남성을 마치 잠재적인 성범죄자처럼 불편함을 느끼도록 했던 부분도”(김재련)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이 고단한 여성 전체의 삶을 대변해주는 상징으로 부각되었듯이, 여성가족부도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부각되었기에 상징을 놓고 벌이는 갈등은 해소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시 말해 상징 투쟁과 진영 전쟁은 모든 문제를 흑백 이분법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무엇이건 상징이 되면 타협이 없는 올인 게임이 되고 만다. 상징은 늘 편 가르기에 따라 성역화되거나 악마화되기 때문이다.

성별 임금 격차를 이대남이 책임져야 하는가?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2020년 기준 66.3퍼센트로 남성 근로자가 100만 원을 벌 때 여성 근로자는 66만 3,000원을 벌었다.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69.6퍼센트다. 그런데 “성별 임금 격차 통계는 ‘허구’다. 정확히는 여성계와 정치권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통계다”(박민영)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임금 격차는 나이에 따라 크게 다른데, 55세 이상은 45퍼센트, 30대 이상부터는 35퍼센트의 차이가 나지만, 20대는 5~8퍼센트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산업, 직종, 업무 강도의 차이를 반영하지 않은 것인데도, 전체의 성별 임금 격차 통계가 이대남을 윽박지르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여성은 항상 피해자고, 남성은 수혜자일 수밖에 없다.
여성 임금은 기혼자들이 ‘본격 육아’를 시작하는 35~39세에 남성의 79.7퍼센트, 40~44세에 69.5퍼센트, 45~49세에 58.6퍼센트로, 50대 이상 여성은 남성의 절반가량 임금을 받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성인지 통계에 따르면, 육아 휴직자 중 남성 비율은 24.5퍼센트, 기혼 여성의 가사 활동 시간은 기혼 남성의 4.1배에 달한다. 그러니 성별 임금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기득권은 사수하면서 이대남을 대상으로만 양보의 미덕을 역설하며 강요해왔다. 여성 차별로 인한 수혜는 기성세대 남성이 보고 있지만, 그 차별을 해소하겠다며 이대남에게 집중된 대책을 내놓고 있는 게 이대남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20대가 갖고 있는 ‘불공정의 감각’의 결함과 한계를 지적하는 데 바빴고, 이대남의 보수성을 비난했다. 다시 말해 전체 성별 임금 격차의 책임은 이대남이 아닌 기성세대에게 따져 물어야 할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대남 신드롬’을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기성세대 남성이 대부분 해먹는 문제의 책임을 이대남에게 묻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위선적 진보’가 시대정신이 아니라면 이대남의 항변과 분노를 무조건 보수적인 것으로 돌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왜 협력할 수 있는 파트너를 적으로 만드는가?

페미니즘이 ‘공공의 적’이 되고, 페미니스트가 ‘최고의 멸칭이 돼버린 시대’에서 우리는 어찌 해야 할까? 백래시와의 전면전만 외치면 되는 걸까?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백래시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페미니즘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 백래시라고 하는 건 부당하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이 너무 과도한 게 아니라 운동이 겨냥하는 타깃이 정확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작 싸워야 할 대상, 즉 페미니스트 코스프레만 하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기성세대 남성은 놓아두면서, 이대남에게 부담이 집중되는 변화만 추구하려고 한다. 이대남이 그런 전략에 반발하는 것을 가리켜 백래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페미니즘의 진전은 페미니스트들의 부단한 투쟁에 의해 가능했다. 그 투쟁은 당연히 여론 투쟁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페미니즘의 편을 늘리고 반대편을 줄여나가야 한다. 반대편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자신이 독선과 오만에 빠져 있는지 살펴야 한다. 페미니즘에 관한 메타페미니즘 담론에 대해 남자가 말하는 것은 주제넘고 싸가지 없고 불경(不敬)한 짓인가? 메타페미니즘 담론은 여성의 독점권이 보장된 영역이니 페미니스트들이 하사하는 담론을 곧게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가? 페미니스트가 원하는 ‘결과의 평등’을 이대남이 원하는 ‘과정의 평등’과 조율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이대남의 반페미니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페미니즘은 ‘남자 대 여자’라고 하는 전통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싹트기 시작한 반감이 갈등의 증폭 과정을 거치면서 ‘반페미니즘’으로까지 나아가게 된 건 아닐까?

이대남은 ‘여성의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페미니스트들과 손을 맞잡고 협력할 뜻이 있다. 그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역사와 구조의 책임을 자신들에게 물으면서 자신들만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남이 왜 화를 내며 페미니즘에 반감을 보이는지 그걸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왜 상호 협력할 수 있는 파트너를 적(敵)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페미니스트가 그리도 많은 걸까?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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