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4:40 (금)
록·포크음악의 자유와 저항…전성기는 지났나
록·포크음악의 자유와 저항…전성기는 지났나
  • 김학선
  • 승인 2022.08.05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K팝 어디서 왔니 ⑥ 록과 포크

대중가요의 역사와 문화를 현장감 있게 조명한 『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1960, 1970, 1980, 1990)가 화제다. 이 시리즈는 한국 팝에 대한 문화연구 측면과 K팝의 뿌리를 찾는 여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특히 『한국 팝의 고고학』은 공간을 중심으로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통사적으로 엮어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에 책의 공저자인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가 ‘K팝 어디서 왔니’라는 제목으로 책에서 못다한 얘기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한다. 

미제 음악을 경전으로 삼아 청년문화로 발전
대학생 순수함 드러냈으나 재즈처럼 비주류로

송창식이 세시봉 무대에 처음 올라 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의 유명한 아리아 「Una Furtiva Lagrima(남 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렀다는 사실은 이제 유명한 일화가 됐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윤형주는 ‘통기타로 아리아를 부른다고? 저 친구는 대체 뭐지?’ 하는 호기심과 함께 송창식의 노래에 매료됐다. 이후의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둘은 트윈 폴리오란 듀오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71년 청평가요제에서 노래하고 있는 김민기(왼쪽), A면 전체를 신중현의 곡으로 꾸민 양희은의 음반. 뒷면엔 신중현과 양희은이 함께 웃는 사진이 있다. 사진=을유문화사

윤형주와 송창식은 모두 세시봉의 ‘대학생의 밤’ 무대에 섰다. 말 그대로 대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실력을 뽐내던 무대.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송창식이 ‘대학생의 밤’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를 홍익대 학생이라 오해한 이상벽의 주선에 의한 거였다. 대학생들은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고 시를 낭송했다. 이를 감상하는 것도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인텔리들의 문화가 세시봉이라는 공간에서 만들어졌다.

한쪽에서 이렇게 고상한 포크 음악이 공유되고 있었다면 다른 쪽에선 다른 형식의 청년문화가 세를 얻고 있었다. ‘싸이키 고고’라 통칭되던 ‘로크(rock)’ 또는 훵크·소울 음악이 밴드 사운드를 통해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울려 퍼졌다. 세시봉의 반대편에 수많은 고고클럽이 있었다. 세시봉을 다룬 영화 「세시봉」이 있었다면 고고클럽을 중심에 놓은 「고고 70」이 있었다. 

영화 「고고 70」에서 ‘고고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은 대학생과는 또 달라 보였다. 고고클럽을 즐기는 이들은 좀 더 ‘날라리’ 같았다. 미군 부대를 목표로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실력을 연마한 밴드맨들과 통기타를 들고 낭만을 이야기하던 청년 음악가들은 쉬이 섞이긴 어려워 보였다. 그 음악을 즐기는 이들 역시 나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태생부터 달랐다. 

각 장르의 태생적인 배경이나 음악적인 지향뿐만 아니라 여기에 이념적인 이유까지 더해져 적대적인 경우도 생겨났다. 1980년대의 록 음악은 가장 미국적인 음악이었다. 당대 최고의 사운드를 흉내 내면서 그들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게 당대 록 음악가들의 목표였다. 반면에 포크 음악을 하는 어떤 이들에겐 상업적인 록과 팝 음악은 ‘미제’의 음악에 가까웠다. 5공 정부에서 주도한 관제 행사 ‘국풍 81’에 참여해 「학」이란 노래로 대상을 받은 서울대 캠퍼스 밴드 갤럭시(Galaxy)의 교내 공연이 학생들의 시위로 취소됐다는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각 장르에서 가지를 뻗은 대표적인 하위 장르 헤비메탈과 민중음악은 1980년대 가장 극단의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록 음악과 포크 음악을 한 장에서 다루는 게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두 장르는 그만큼의 공통점도 많다. 이 음악들은 사상적인 면에선 같지 않겠지만 결국 ‘미제’의 음악을 경전으로 삼아 발전한 음악이다. 여기에 ‘청년문화’란 이름으로 한데 묶였고, 너무 단순한 도식이긴 하지만 ‘자유’와 ‘반항’이란 키워드로 두 음악은 늘 함께 이야기됐다. 초기 대학가요제 무대에서 대학생의 순수함을 가장 잘 보여준 음악도 록과 포크였다. 1971년 8월 개최한 ‘한국의 우드스탁’ 청평 페스티벌 무대에선 록과 포크의 상징적인 존재인 신중현과 김민기가 같은 무대에 섰다. 히식스도, 양희은도 청평의 자연에서 각자 자신의 소리를 들려줬다. 

 

순수의 정의·지성적 음악 포크에 록을 입히다

이 두 음악을 함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신중현은 청년 포크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양희은, 서유석 등과 협업하기도 했고, 이정선은 포크와 록 양쪽 모두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30대」 같은 앨범에선 포크 음악과 블루스 록 음악을 함께 들려주기도 했다. 순수의 정의를 갖고 지성적인 음악으로 통하던 포크 음악에 록의 어법을 입힌 조동진, 들국화, 따로 또 같이, 신촌블루스 등이 등장하면서부터 둘을 함께 언급하는 건 그리 어색한 것이 아니게 됐다. 

등장과 함께 ‘한국 록의 적자’라 평가받았던 윤도현의 음악이 ‘포크 록’이라 불리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자신을 대표하는 앨범 「한국 Rock 다시 부르기」에서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과 한국 포크의 시작인 김민기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윤도현과는 비슷하면서 다른 또 다른 강산에는 한대수의 적통을 이었다. 그는 로커였지만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던 한대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신중현의 음악을 추앙한 건 물론이었다. 하지만 록과 포크의 시대는 다시 주류의 자리엔 오르지 못했다.

지금 록과 포크는 전성기를 한참 지났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록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의 변방에 머물렀다. 넥스트 같은 드문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는 한 장면을 대변한다기보단 아웃라이어에 가까운 경우였다. 세계적인 흐름에서도 록 음악은 주류와 더 멀어졌다. 1990년대에 태어난 젊은 음악인들이 브릿팝이나 슈게이징 같은 1980~1990년대의 음악을 새로운 경전으로 삼아 다시 록 음악을 들려주고 있긴 하지만, 록은 고상한 순수음악이 돼가고 있는 재즈의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더 높다. 

포크 역시 다르지 않다. 지금 한국 인디(언더그라운드) 장면에는 많은 수의 젊은 포크 아티스트가 등장했지만 케이팝의 세상에서 이들을 비주류라 말한다 해도 실례는 아닐 것이다. 어떤 음악은 포크보다는 ‘어쿠스틱 팝’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통기타를 장식품처럼 사용한다. 시장의 변화와 함께 포크는 ‘감성 음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돼버렸다. 반세기라는 시간은 화학적 결합이라 칭송 받던 ‘포크 록’ 음악을 가장 안 팔리는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 변화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저 이를 묵묵히 좇고 기록할 뿐이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