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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간 역사문제 대결…‘파시즘의 잔재’ 대 ‘자유민주주의 사상’
한일 간 역사문제 대결…‘파시즘의 잔재’ 대 ‘자유민주주의 사상’
  • 김재호
  • 승인 2022.08.03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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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학을 비판한다①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올해로 광복 77주년을 맞이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식민지 근대화론과 좌우 대립 등 이념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연 한국인은 당파 싸움만 하며 전통만 고수하다가 나라를 빼앗겼을까. 이번에 출간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시리즈는 그동안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던 일제 식민사학의 실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대학·언론·박물관·철도주식회사·조선총독부 등은 과연 어떤 식으로 식민사학을 개발해왔는지 알아본다. 첫 번째는 비판 총서 공동연구의 책임을 맡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다. 

 

“근대화 성공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에 나섰다는 건 면죄부 주는 셈”
“수입 이론에 자국 상황을 해석하는 차원은 속히 넘어서야 할 과제”

“일본이 자본주의 경제를 궤도에 올려 제국주의 침략주의 길로 들어섰다는 건 거대한 침략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는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교수는 “근대 일본은 구미 바깥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로 대외 침략사도 제국주의 일반론의 차원에서 평가했다”라며 “현재 일본 우익이 영광의 역사로 자부하는 대목”이라고 비판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현재 한국역사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이 교수는 역사학회 회장, 한일역사가회의 한국 측 운영위원장,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다.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을 집필했다. 사진=김재호

이 교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유수록(幽囚錄)』을 살펴봤다. 이에 따르면, 근대화에 성공해서 침략주의로 이어진 게 아니라, 침략주의를 기획했기에 그 실천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했다. 이 교수는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대외 침략론)으로 알려지는 『유수록』은 “일본이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우수한 기술 문명을 속히 배워 힘을 길러 구미 열강에 앞서 주변 나라를 먼저 차지해야 한다고 했다”라며 “그 대상을 홋카이도-류큐-타이완-조선-만주·몽골-중국(본토) 순으로 열거하고 여기서 힘을 배가하여 태평양으로 나가 호주와 미국 캘리포니아로 진출할 것을 제시했다”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요시다 쇼인은 이 글을 남기고 29세로 일찍 죽었지만,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 왕정복고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에 선생이 제시한 방략을 순서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라고 말했다.

 

고종·순종실록에 고의로 누락된 사료들

중일 전쟁이 대동아전쟁으로 확대될 때, ‘대동아공영권’ 이론을 위해 도쿄·교토 두 제국대학에 동양문화연구소, 인문과학연구소가 세워져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전후에 두 제국대학은 그들의 역사학을 반성했을까? 이 교수는 “1945년 8월 패전 후 도쿄·교토 두 제국대학의 후배 교수들의 동향은 이번 연구의 대상은 아니었다”라며 “그러나 전후(戰後) 일본 역사학계의 동향을 대강 살펴본 것으로는 적극적인 반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라고 답했다. 그는 “2005년에 도쿄대학의 철학전공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교수가 서울대에서 행한 강연에서 일본에는 아직도 양심의 자유가 확립돼 있지 않다고 한 말이 이 연구를 마치면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라며 “그는 그때 민주화에 앞선 한국으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일간의 역사문제는 현재 파시즘의 잔재와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대결하는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일 간 역사문제의 핵심엔 ‘고종 시대사’가 있다. 고종 시대사는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 편찬한 『고종실록』은 고의로 자력 근대화에 관한 많은 자료를 활용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고종 시대의 각 부처의 등록(謄錄) 류 기록물이 산적해 있다. 「규장각 소장 고종 시대 공문서 시개정목록」(2009)에 따르면 무려 8천349종 2만3천616책에 달하는 고종, 순종시대 정부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라며 “서영희 한국공학대 교수(한국근대사)의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 수집과 역사편찬』이 1927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시작한 『고종실록』, 『순종실록』 편찬에서 이 사료들은 고의로 활용하지 않은” 사실을 체계적으로 밝힌 것을 높이 평가했다.

이 교수는 “예컨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정부가 미국 에디슨 전등회사(Edison Light Company)와 계약하여 1887년에 경복궁 내 건청궁 일원에 처음 켜진 백열등 사업이라던가, 1898년 한성전기 회사의 전차 시설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1885년부터 1893년까지 한반도 남북, 동서에 전신시설이 완성된 것도 주목할 사업이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라며 “『고종실록』은 이 사업에 관한 기록을 전혀 올리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서울의 전차는 도쿄보다 3년이 빨랐다.” 이 교수는 “전차의 경우, 한 시민이 전차에 받친 사고 기사에 주기(注記)로 짧게 전차 시설이 있었다고 적었다”라며 “고종이 내탕금으로 설립한 한성전기회사는 통감부 시대 일본인들에게 빼앗겨 경성전기회사가 된다. 이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면 한국이 저들의 보호국이 돼야 할 이유가 없어지므로 고의로 기록에 올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 편찬해야 할 주요 사업일 수밖에 없다.

 

국가 신도 반대하며 자기 반성 추구하다

청일전쟁을 반대한 가쓰 가이슈나 국가주의에 찬동하지 않았던 사카모토 료마나 사이고 다카모리, ‘국가 신도(神道)’ 이념에 거리를 둔 도리이 류조, 전후 새 역사학을 주장한 우에하라 센로쿠 등 일본 내에서도 자기반성을 추구했던 이들이 많다. 이 교수는 “국가 신도는 천황제를 일본 역사의 몸통으로 삼고 천황의 영광이 곧 일본의 영광이란 논법으로 주변국 정복 정책을 펴서 세계 제패를 향해 대소의 전쟁을 일으켰다”라며 “일본제국의 국가 신도는 일본 독존의 정신세계로서 보편성을 결여하여 어떤 사상, 종교와도 타협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메이지 천황제에 반대한 가쓰 가이슈는 기독교 신자로서 국가 신도에 반대한 셈”이며, “사이고 다카모리는 주자학과 양명학에 정통한 1급 유학자로서 정한론자가 아니라 조선이 과연 일본제국에 무례를 범하는 나라인지 확인한 뒤에 정벌해야 한다고 진짜 정한론자들을 비판했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제국시대 역사학자 도리이 류조, 전후의 자유민주주의 역사학을 부르짖은 우에하라 센로쿠 모두 기독교 신자”라며 “이들은 기독교나 유교를 위해 투쟁한 것이라기보다 국가 신도가 인류 보편성을 상실한 것에 대해 저항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번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시리즈에서 2권을 집필했다. 그 중 1권은 대한민국학술원에서 선정하는 2022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됐다. 사진=김재호

그렇다면 우리 강단 역사학계가 반성할 점은 무엇일까?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를 보면, 다음과 같은 지적이 나온다.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방법론적 잣대가 실은 식민사학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역설에는 ‘식민주의적 의도’에 대한 판에 박힌 듯한 비판적 구호와는 별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가령 어느 순간부터 식민사학 비판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전쟁’처럼 돼버린 측면이 있다.”(99쪽) 이 교수는 이에 대해 일국사 관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일본제국의 국가 체제와 관련해 살펴보니 일본제국의 침략주의 실체 파악에 역사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일본제국이 추구한 길이 천황제 신성성을 강조하여 일본 혼자 살아 남기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일제 침략에 저항 투쟁한 우리선조들의 정신세계가 상대적으로 너무나 귀한 것으로 느껴졌다”라고 소회했다. 이 교수는 안중근 의사가 죽음 직전 “내가 인약(仁弱)의 나라의 국민인 탓이라”는 것을 깨달아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고 하는 고백(『안응칠 역사』, 1910), 백범 김구 선생이 부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나라’를 바라는 정신세계(『나의 소원』, 1947)를 언급했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라는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었다.

“자연과학은 몰라도 인문학, 사회과학은 아직도 대외 의존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대학·교수사회에 조언을 부탁하자, 이 교수는 “수입 이론에 자국 상황을 해석하는 차원은 속히 넘어서야 할 과제”라며 “한국 근현대사는 그 사이 사료 정리가 상당한 진전을 보았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단계에서 제자리걸음 상태”라고 답했다. 그는 “더 많은 사료를 보면서 이를 근거로 역사의 진실 추궁에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20세기 초 중국의 석학 후스(胡適, 1891∼1962)의 경구를 들려줬다. “학문함에서는 의심이 없는 곳에서도 의심하고, 사람 대함에서는 의심이 있더라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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