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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을 소멸시키는 미메시스
모델을 소멸시키는 미메시스
  • 양창렬 프랑스통신원
  • 승인 2006.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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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의 미메시스적 해체 국제콜로키엄

▲필립 라쿠-라바르트 ©

지난 1월 27, 28일, 핀란드 연구소와 소르본에서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를 둘러싼 국제 콜로키엄이 "미메시스적 해체"라는 제하에 열렸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과 버클리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라쿠-라바르트는 프랑스나 미국에서의 유명세에 비해 아직 국내에는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은 철학자다. 따라서 이 짧은 지면을 통해 위 콜로키엄 전체 내용을 맥락 없이 갈무리하기보다, 라쿠-라바르트 철학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는 '미메시스' 개념이 제기하는 쟁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라쿠-라바르트는 일찌기「도상적 유형학(Typographie)」이라는 논문(『분절의 미메시스』(1975)라는 공동 저작에 수록)에서 르네 지라르를 논하는 가운데 미메시스 개념을 다룬 바 있으며,『근대인의 모방, 도상적 유형학2』(1985)에서 이 개념을 보다 본격적으로 다룬다. 다행히 라쿠-라바르트의 미메시스 개념은 최성만 교수의 논문,「미메시스와 미메톨로지」(『뷔흐너와 현대 문학』, 18권, 2002)에서 한 차례 다뤄진 바 있으므로, 일단 그것을 "우리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아도르노의 근대적 미메시스 기획과 라쿠-라바르트의 해체적 미메시스 기획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후자가 제기하는 쟁점을 보다 명확히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미메시스론은 모방하는 주체와 모방되는 객체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주체가 이 모방 과정에서 원본이 되는 자연을 남김없이 흡수, 동일화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것은 "객체 및 타자의 우위"에 대한 인정 혹은 "객체에 대한 지향성"으로 개념화된다. 여기에서 주체는 언제나 하나의 실체이자 합리적인 부분["구성적 요인"]으로 간주되며, 모방은 그 실체에 덧붙여지는 충동적 부분["표현적·미메시스적 요인"]으로 제시된다. 이 둘이 하나로 융해되어 뒤섞이거나 변증법적으로 화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부정 변증법이 핵심이며, 이것이 합리적 미메시스라는 기획이 의미하는 바다.

▲라바르트의 저서 ©

반면, 라쿠-라바르트의 미메시스론이 기초하고 있는 "모방의 역설"에 따르면, 모방이란 일괴암적 주체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혹은 '나'라고 간주되었던 것들을 제거하는 과정이며, 오히려 끊임없는 모방[비고유성]을 통한 자기 소외 과정 속에서 자기 안의 타자[고유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것이 유사해지면 유사해질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구별된다"라는 말이 뜻하는 바이다. 이 구절은 라쿠-라바르트가 해석하는 디드로의 역설 개념이 가진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의 이행, 두 무한히 대립하는 것들의 등가적 교환을 성립하게 하는 쌍곡선적인(hyperbolique) 운동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모방은 더 이상 자신의 고유성과 배우로서의 가장(假裝) 사이의 소외 관계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안드레아 칼로자리가 디드로의 배우론에 대해 말했듯이, "위대한 배우는 소외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소외되지 않는다. 위대한 배우는 타자이며, 이타성과 일치한다".

최성만 교수는 상기 논문에서 아도르노의 편에 서서 해체론자들에게는 "역사적 경험, 주체성에 대한 관심, 심미적인 것의 유토피아적 기능, 정치적·사회적 관심"이 부재하다고 비판한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비판들에 정확히 상응하는 답변들을 라쿠-라바르트에게 기대할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그의 철학에서 어떻게 새로이 사유되는지, 그것이 환기하는 위험은 무엇인지를 정치적 차원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첫째, 라쿠-라바르트는 모방의 문제를 시간성 속에서 사유한다. 모방되는 것과 모방하는 것 사이에는 시간적 간극이 있으며, 소포클레스의『안티고네』와 횔덜린의『안티고네』가 보여주듯이, 후자는 전자를 해체, 번역, 다시 쓰기 작업을 통해서만 모방할 수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사실상 그리스인들[모방의 대상]의 고유함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모방불가능하며, 따라서 모방이란 결국 원본이 끊임없이 말하지만 "결코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역사와 미메시스」에서 라쿠-라바르트가 지적하듯이 "과거는 그것이 순수한 가능성을 지칭하는 한에서만 모델일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미메시스는 이미 구성된 모델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델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모델의 소멸", 모방 가능한 것의 폐허와 부재 속에서 시작하는 비극의 논리를 보여줄 뿐 아니라, 더 이상 원본과 모사 사이의 시간적, 존재적 연속성에 근거하지 않은, 둘 사이의 불연속과 단절에 주목하는 것이다.

둘째, 해체론자들의 모방 개념은 '주체'에 대한 논의가 없는 텍스트 놀이일 뿐일까? 물론 해체적 모방은 자발적 소외를 통해, 나 안에 있는 일종의 공백, "유령", "자기 바깥"을 드러내고, "특성 없는 인간", 주체 없는 주체에 대해 말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필립 라쿠-라바르트, 재현과 주체의 상실』(2006)의 저자, 존 마티스가 말했듯이 "상실-중인-주체(subject-in-loss), 엑소더스-중인-자아", 혹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탈존(ek-sistenz)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타자에 개방됨으로써만 의미를 가지는 주체이다. 여기에서 근대적 주체성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셋째, 앞에서 설명된 두 가지로부터 우리는 "모방적 주체화"라는 것이 엄밀히 말해 언제나 도래할 것으로서의 주체성이라는 고유한 유토피아적 시간성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로서의 모방은 도래할 주체에 대한 윤리적 기획과 하나가 됨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메시스는 좁은 의미의 예술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인민, 문명"은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같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쿠-라바르트의 분석에 따르면 나치즘은 서구 주체 형이상학의 극단적 표현이자, 신화와 그것에 대한 모방 구조에 기초한다. 요컨대 주체성-형이상학-정치-미학-신화의 계열들이 미메시스를 중심으로 수렴된 형국이다. 이른바 존재-모방론(onto-mimé tologie). 우리는 나치즘과 미메시스의 관계를 위에서 논한 해체적 모방의 구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다. 나치즘이란 인민의 자발적 복종 및 상호 모방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절대 타자로서의 주권자, 끊임없이 스스로 법 바깥에 위치하고자 하는 예외적 주권자로서의 총통에 개방됨, 그 과정에서 행해진 정치의 "연극화"―라쿠-라바라트에게 미메시스는 기본적으로 연극성이다―인 셈이다.

우리는 이를 다른 식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라쿠-라바르트가「횔덜린과 그리스인」에서 말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테크네 개념―자연이 할 수 없는 것을 보충하는 측면[생산]과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측면[재생산]을 모두 가진―이 내포한 긴장은 고유함과 비고유함, 민족적인 것과 이방인적인 것의 범주 속에서 나타난다. 라쿠-라바라트는 여기에서 낯설음, 섬뜩함(Unheimlichkeit)을 강조한다. 가장 낯선 것에서 가장 고유한(propre)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역으로 가장 고유한 모방이 전대미문의 낯선 결과물을 가져온다는 말과 쌍둥이이다. 그리고 이는 가장 민족적일 때 가장 이방인―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다는 도착적인 나치즘 논리와 겹쳐진다.

즉, 라쿠-라바라트의 미메시스론은 "타자에로 개방된" 혁명적 정치와 "타자를 생산하는"―그것은 유태인이라는 타자와 총통이라는 타자를 동시에 생산했다― 나치즘이 쌍둥이이며, 이 둘의 긴장 관계 속에서 우리는 순식간에 어느 한 쪽으로 빠질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따라서 미메시스 개념이 더 이상 순수 예술의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 정치가 될 때 그것은 언제나 양가적―"미메시스의 파르마코스(pharmakos)"―이며 주의를 요한다. 바로 이것이 단순히 모방 혹은 미메시스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메시스의 해체, 해체적 미메시스를 논하는 필립 라쿠-라바르트가 우리에게 제언하는 바이다.

양창렬 / 프랑스 통신원·파리 1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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