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0:30 (금)
침묵 知性, 또 하나의 이익집단
침묵 知性, 또 하나의 이익집단
  • 박영신 연세대
  • 승인 2006.02.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세이: 근원적 반성이 필요한 시대

미련한 침묵

우리는 무책임한 침묵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다수의 무관심에 짓눌려 서럽게 살다 스러져도, 힘 있는 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다 넘어지고 죽어도, 거대한 힘에 맞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해도 움쩍도 하지 않는다. 삶의 터전이 허물어진다 하더라도 사사로운 거처로 퇴거하여 계속 묵언하는 데 익숙해져 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수십조 원의 부가가치를 낳게 될 것이라며 그렇게들 호들갑 떨며 복제의 ‘원천 기술’(?)을 자랑하던 그 화려한 연구의 결과가 한낱 허위와 날조의 종이쪽으로 판명되고 있을 때도, 잠시 동안 실망감과 허탈감에 빠져들 따름이다. 침묵의 굳은 타성은 여전히 건재하다.

▲박영신 교수 ©
이 삶의 공동체를 비통에 빠지게 하는 일들이 어디 하나둘이겠는가? 곳곳에서 벌어진 대립과 대결의 싸움 마당, 극과 극으로 벌어지는 격차의 구조화, 사회 약자들이 배제되고 있는 비정한 세계, 수상쩍은 온갖 수단을 다 끌어들여 재산을 불리면서도 마냥 방자스러운 태도, 이 답답하고 우울한 정경들이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얼어붙은 침묵은 해동의 기운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이러한 침묵이 분주한 일상에 침투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시대의 해설자로 역사를 향해 발언해야 할 오늘의 지식인마저 침묵의 행렬에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언해야 할 자들의 태평스런 침묵에 우리는 어리둥절하다.

무엇 때문인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침묵케 하며 어찌해서 그들은 실어증 환자처럼 발언 능력을 잃고만 것인가. 무엇 때문에 발언해야 할 지식인들이 이렇듯 무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지식의 지배

지식의 오름세는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삶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지식 또한 종교의 권위 밑에서 그 지배를 받아 왔다. 궁극의 의미와 가치를 자아내며 인간의 삶을 이끈 진리의 담지 기능은 종교의 몫이었다. 그 일에 지식은 불가결의 요소였다. 종교의 정당성과 지배 논리를 만들어 내는 역을 지식이 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애초부터 지식이란 간단히 짓누를 수도 없고 제쳐 둘 수도 없는 지배 체제의 도구였다.

그렇다 해도 지식은 종교의 권좌에 빌붙어 산 아첨꾼이요 하수인이었다. 그것이 지식의 존재 양태였다. 그러나 지식은 종교의 지배체제에서도 은밀히 자체의 힘을 키우면서 종교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갔다. 찬탈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전술을 동원하여 한판 승부를 걸었다. 종교는 계몽 이전의 시대에서나 통용되는 반이성의 미신 덩어리라며 몰아붙여 그 세력의 분쇄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 술책은 주효했다. 마침내 종교는 지금껏 누려왔던 권위를 지식에게 내어주고야 말았다. 근대의 승리는 그렇게 쟁취한 지식의 승리였다.

지식은 이제 지난날 종교가 휘두르던 권위의 지팡이를 손아귀에 쥐었다. 도도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모든 삶의 영역이 지식 앞에 무릎을 꿇도록 지식의 값을 계속 올리었다. 지식 이상 더 값을 높이 매길 수 있는 자본은 허용하지 않았다. 어떤 세력도 지식 자본이 지배하는 체제를 도전할 수 없게 높은 담을 쌓아올렸다. ‘지식의 왕국’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절대의 자리에 올라서 지식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오늘의 지식 혁명과 지식 사회가 그렇게 형성되었으며, 지식의 지배 체제가 그렇게 구축된 것이다. 

지식인의 습속

지식 계급에게는 지식의 소유자들이 누리고 보장받는 지식의 이익이 최종의 목표이며 절대의 관심 항목이다. 이 점에서 시정의 다른 이익 집단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지식의 절대 우위의 자리를 고집한다. 그러한 지식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타도의 대상이다.

그렇게 하여 지식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제재를 받지 않으려 한다. 때로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방어하고 때로 가치중립성을 내걸어 오만한 객관자의 외관을 쓰고 으스댄다. 지식인은 사회 어느 층의 사람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바르고 정밀한 잣대를 갖고 있다고 주창한다. 지식 세력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할 때도 시민의 분쟁을 해결할 때도 전문 지식을 지닌 ‘중립 인사’의 자리에 올라 언제나 중재하며 결론을 이끌어낸다.

‘전문가의 견해’라고 하는 것에 반론을 던지게 되면 곧바로 예의 반격에 나서 상대를 몰아붙인다. 사실의 근거가 없거나 객관성과 공정성을 결한 감정과 편견에서 나온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며 즉각 질타하고 식견이 부족한 ‘비전문가’의 허술한 주장이라며 낙인찍어버린다. 나아가 지식 탐구에 윤리 문제를 던지고 논쟁을 벌이는 자는 제거되어야 할 거추장스런 걸림돌이며 처치해야 할 성가신 방해꾼으로 여겨버린다. 학연과 지연과 혈연을 다 동원하여 지식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는 한에서 윤리를 말하고 도덕을 이야기할 뿐이다. 지식인의 이익에 반하는 논쟁이란 예외 없이 시간과 자원의 낭비로 규정한다. 전문 지식의 소유자는 누구도 도전해서는 안 될 모든 것에 대한 최종 심판자로 올라선다.

전문 지식의 소유자들에게 시민은 거북한 사회 세력이다. 전문 지식인의 값을 떨어뜨리고 전문 지식의 권위를 깨뜨릴 수 있는 힘이 이들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전문 지식에 터해 능률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겠다며 거드름을 부리는 자들에게 문제를 던지는 것은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민이 내지르는 함성이나 시민의 집회와 시위는 감정에 치우친 것이라며 곧잘 그 의미를 축소하여 뭉개버린다. 한 비구니의 단식 같은 것은 이성을 잃은 별난 자의 기행쯤으로 여겨 비켜갈 뿐이다. 그리고는 전문 지식인 집단이 이성과 합리성에 터하여 ‘차분한’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며 시민을 꾸짖고 호령하듯 우쭐거린다. 지식의 소유 계급이 익혀온 습속이다.

이렇게 그들은 지식의 울타리 안에 갇힌 지식 체제의 수호자이다. 그 체제 밖의 넓은 세상은 관심의 영역으로부터 제거된 지 오래다. 지식으로 포장해 짐짓 품격이 있는 듯하지만 지식 지배의 체제를 고수하고자 하는 자기 집단의 이익을 챙기기에만 혈안이다. 뻔뻔스러운 거리의 집단 이기주의자들과 같은 행태이다. 

새로운 자유로

지식은 자유의 선도자였다. 탐구의 자유를 옥죄어 왔던 종교의 권위를 무너뜨린 것은 지식이의 힘이었다. 자유는 그렇게 확보된 역사의 쾌거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한정된 자유였다. 지식을 위한 자유 곧, 지식의 지배 단계에서 멈춰버린 자유였다. 자체의 지배를 질문하고 그 지배 체제를 관통하여 넓은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끝이 없는 자유’의 관심은 아예 없었다.

역설이다.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바깥 세력의 침입을 차단코자 높이 세워두었던 견고한 울타리 바로 그것이 지식 소유 계급의 관심 세계를 구속하는 담벼락이 되었던 것이다. 지식인은 이 비좁은 울안에 갇혀 유쾌한 자기만족의 놀이에 빠져 있다. 자유로운 듯 행세하나 실은 좁은 집단의 이익에 예속되어 넓은 삶의 터전을 눈여겨볼 수 없게 된 부자유한 삶을 살아간다. 싸워 얻은 자유가 부자유한 감방으로 퇴락한 것이다.

지식의 자본으로 치부하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자 구축해 놓은 지식의 체제와 그 절대화의 굳은 담벼락을 허물어야 한다. 그 속으로 퇴거하여 빗장 걸고 안주해 온 자기 이익의 담벼락을 넘어 공동체의 선을 위해 발언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비록 뒤늦은 각성이라 하더라도 자기 집단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참다운 지식인에게는 그 어떤 ‘자기 초월’의 몸짓도 너무 늦지 않다. 시작은 장대한 약속이다.

참된 지식인은 지식의 체제에 몸담고 있으나 거기에 구속되지 않는 자기 초월의 가능성을 겨냥한다. 자기 속박의 좁은 공간을 넘어선다. 외양간으로부터 풀려난 송아지처럼 넓은 들판으로 나아가 뛰어논다. 거기서 뒹굴며 춤도 춘다. 자유의 시를 읊고 비판의 노래를 부른다.

그 자유의 춤 놀이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 연세대 교육학 석사를 마치고 예일대를 거쳐 버클리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옥스퍼드 하버드 드에서 연구하였으며 학술 계간지 『현상과 인식』의 창간 동인, 편집인, 대표를 역임하였다. 한국사회이론학회, 한국사회운동학회 및 한국인문사회과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녹색연합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 『외솔과 한결의 사상』,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 : 바츨라브 하벨의 역사 참여』, 『우리 사회의 성찰적 인식』, 『역사와 사회 변동』, 『사회학 이론과 현실 인식』 등 다수의 역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