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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적 경계긋기, 평등에 기여…형용사 ‘리버럴’에 주목
자유주의적 경계긋기, 평등에 기여…형용사 ‘리버럴’에 주목
  • 김재호
  • 승인 2022.07.22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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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⑬ 박수형 서울특별시의회 입법조사관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 2일 박수형 서울특별시의회 입법조사관이 「자유주의의 변용: 역사와 사회적 맥락」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14강은 이근식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경제사상)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제15강은 손화철 한동대 교수(기술철학)의 「기술 발달과 인간의 자유」, 제16강은 도승연 광운대 교수(정치/사회철학)의 「자유와 근대 감시 체제」, 제17강은 송지우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의 「자유주의에서의 평등」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포퓰리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리버럴한 민주주의자들이 필요하다. 
좌파 집권 체제에서 자주 나타나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성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리버럴한 사회주의자들이 필요하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민주 정치의 퇴행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는 대안 모색을 위한 이념적 자원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보편적 가치와 이상의 관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 자유주의 탐구는 현재의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다. 셋째, 자유주의는 우리나라의 강력한 국가(주의)의 문제를 이해하고 개선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박수형 서울특별시의회 입법조사관은 왈저의 정치철학을 설명했다. 왈저는 이념으로서 명사인 자유주의가 아니라 형용사인 ‘리버럴’을 강조한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마이클 왈저(1935∼)의 자유주의 논의는 그의 정치 이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세 가지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 첫 번째는 극단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다. 왈저에게 개인은 다양한 공동체와 사회 영역 속에서 자아를 형성하며, 그 속에서 개인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적 의미의 공유·해석·수정을 통해 도덕을 고취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존재이다. 두 번째는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다. 극단적 개인주의와 함께 재산권, 시장의 자유 등을 신성시하는 통상적 의미의 자유주의로는 심화되는 불평등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없다. 세 번째는 과잉 이념에 대한 경계이다. 왈저는 전 세계 역사에 걸쳐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체론적 이념 내지 이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왈저의 논의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흔히들 이해하는 자유주의와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핵심은 다섯 가지 테제다. 테제 ① : 자유주의란 사회라는 지도에 경계를 긋는 일과 같다. 테제 ② : 자유주의자들이 그은 경계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허구가 아니다. 테제 ③ : 자유를 위한 경계는 평등에도 기여할 수 있다. 테제 ④ : 자유주의적 경계는 개인이 아닌 사회를 기반으로 한다. 테제 ⑤ : 민주 국가와 시민의 역할은 자유주의적 경계를 지키고 다시 긋는 데 있다.

왈저의 경계 긋기는 전형적이고 통속화된 자유주의가 경시하거나 오해했던 사회적 가치, 제도, 실천을 자유주의를 변형한 이론 틀 속에서 설명하고 옹호한 시도로 이해된다. 기존의 자유주의 논의는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평등을 놓쳤고, 개인을 강조한 나머지 그 개인들을 이어주는 사회를 놓쳤으며, 제한 정부의 원리를 강조한 나머지 정부가 시민들의 자유 증진을 위해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놓쳤다. 

개인의 자율성과 이성적 판단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정치 활동 대신 ‘숙의(deliberation)’를 이상적인 정치 활동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왈저가 보기에 숙의는 실제 민주 정치에서 작은 부분만 차지하며, 사회 갈등을 둘러싼 현실 정치는 그보다 훨씬 더 광범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왈저는 숙의가 민주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역할이 독립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정치의 세계에는 숙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는 배심원실 같은 공간이 없다. 왈저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숙의의 효능은 숙의와 무관한 다른 활동에 의존한다. 유의미하고 효과적인 정치를 위해서는 숙의민주주의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넓은 정치 공간에서 숙의와 함께하는 정치 활동을 펼쳐야 한다. 

왈저가 보는 난국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사회적 차별의 확산, 정치적 양극화와 성·인종·민족·세대 간 갈등의 분출, 포퓰리즘의 부상과 민주주의의 위기가 그것이다. 왈저는 이런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보려는 이들에게, 자유에 관한 논의의 초점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명사 ‘리버럴이즘(liberal-ism)’에 둘 것이 아니라 형용사 ‘리버럴(liberal)’에 맞춰보자고 제안한다.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보다 도덕적 가치로서의 자유(주의)적인 것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색다른 주장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왈저도 예전에는 다른 모든 이념들(-isms)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도 하나의 이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유 시장, 자유무역, 표현의 자유, 국경의 개방, 최소 국가, 극단적 개인주의, 시민적 자유, 종교적 관용, 소수파 권리 등 많은 것들을 포괄하는 이념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와 같은 원리들은 대부분 자유지상주의로 이해되며, 미국에서 스스로를 ‘리버럴’(정치 성향을 나타내는 사람 명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원리를 (최소한 그 모두를) 수용하지 않는다. 미국의 리버럴들은 시장 규제 강화, 부의 재분배와 복지 급부 확대를 옹호하며, 상대적으로 드물긴 하지만 공동체적 결속과 상호부조에도 호의적이다. 형용사 리버럴은 명사(이념적 실천)의 힘을 제어하며 ‘다원주의, 회의적 태도, 아이러니’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토록 함으로써 지금과 다른 종류의 정치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왈저의 핵심 주장이다.

민주주의 위대한 성취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정부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정말이지 형용사 리버럴은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그 결정 과정에 들어오도록 했다. 이는 고대 아테네부터 20세기 전반기의 미국까지 시민의 일부가 정당한 이유 없이 배제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성과임에 분명하다. 시민적 권리와 자유는 정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가진 정당한 소유물이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흑인이라고 해서, 여성이라고 해서, 채무자나 범죄자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다고 해서 예외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왈저는 좌파로 불리는 이들이 리버럴한 민주주의자, 리버럴한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은 리버럴한 민족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이고, 리버럴한 공동체주의자이며, 리버럴한 유대인이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도 이런 태도에 공감하기를 바란다. 형용사 리버럴은 우리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누가 되는지,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념 내지 신념을 ‘어떻게’ 실천할지를 결정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어떻게’에 관한 설명이다.

최근 들어 기세를 올리는 포퓰리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리버럴한 민주주의자들이 필요하다. 좌파 집권 체제에서 자주 나타나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성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리버럴한 사회주의자들이 필요하다. 확산 일로에 있는 외국인 혐오, 반무슬림, 반유대인 성향의 민족주의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리버럴한 민족주의자들이 필요하다. ‘정체성 정치’와 관련된 일부 집단의 배타적 열정과 극단적 당파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리버럴한 공동체주의자들이 필요하다. 예상치 못한 종교적 광신자들의 부상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리버럴한 기독교인, 이슬람교인, 불교인, 유대교인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싸움이며, 형용사 리버럴이 가장 좋은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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