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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은 물질적, 물질은 정신적…수동에서 능동으로
정신은 물질적, 물질은 정신적…수동에서 능동으로
  • 김종갑
  • 승인 2022.07.20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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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신유물론』 몸문화연구소 외 9인 지음 | 필로소픽 | 292쪽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생태계의 일부이자 행위자
신유물론, 휴머니즘적 에피스테메를 전환하는 시도

물질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바위? 나무? 고양이? 코로나19? 자연? 기계? 자동차? 플라스틱 쓰레기? 기후변화? 오존층? 물질에 대한 질문은 그러한 이미지와 뗄 수 없다. 우리는 물질에 에워싸여 물질과 더불어서 물질적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물질을 과거의 유물론적 시각으로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는 인류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었던 물질들이 이동하고 움직이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는 그와 같이 움직이는 물질들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신유물론은 종말론적 담론과 재난영화들이 무성하던 21세기 초반에 출현하였다. 기후변화는 그때까지 인간 삶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던 자연이 인간을 멸종시킬 수도 있는 적극적 세력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인간만이 주체로서 행동하고 물질은 이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질도 행동한다. 그렇다고 정신과 물질, 인간과 비인간이 각자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실체라는 것은 아니다. 물질과 정신은 서로 다른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상호 침투적 관계이며 과정이고 양자는 서로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정신이 물질적이듯이 물질도 정신적이다. 이와 같이 신유물론은 과거 유물론과 관념론이 간과했던 물질의 행위성을 이론화하려는 시도이다.

신유물론의 ‘신New’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과연 신유물론자들의 주장처럼 그것은 새로운 이론일까? 그리고 신유물론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기후위기의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효율적인 이론일까? 

신유물론의 ‘신’은 전통적 유물론의 계승이나 재해석, 비판적 발전의 관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유물론이 일관된 이론으로 무장한 체계나 학파로 정착한 것도 아니다. 신유물론자로 분류된 이론가들도 하나의 동일한 방법론이나 관점, 용어들을 공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느슨하지만 지형이 분명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근대의 특징이었던 수동적이고 관성적으로 정의되었던 물질관과 기계론, 휴머니즘, 몸과 마음의 이원론, 실체론적 존재론을 반성적으로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능동적 물질관, 생기론, 포스트휴머니즘, 몸마음의 일원론, 관계론적 존재론을 모색하거나 제안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문명화 시도에 복종하지 않는 자연

근대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모든 존재들 가운데 유일하게 지적이며 정신적인 존재로서, 자연과 물질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행동을 한다면 비인간은 행동을 당한다. 이 점에서 근대의 역사는 인간이 자연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자연을 상품화하고 기계화하며 문명화하는 역사였다. 자연은 묵묵히 그러한 문명화의 시도에 복종하는 듯이 보였다. 적어도 생태계의 위기가 도래하는 20세기 중반까지는 그런 듯이 보였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자연이 기지개를 펴더니 사지를 움직이며 일어서기 시작하였다. 물질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생태계의 일부이자 행위자였던 것이다. 신유물론은 지금까지 불활성 물질로 간주되었던 비인간 존재의 행위 능력을 구성하기 위한 이론적 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물질의 행위 능력을 복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문제의 초점은 물질의 운동이 아니라 행위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물이 흐르고 풍차가 돌아가듯이 물질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풍차와 물이 행위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행위에는 행위자의 의도와 생각, 정보, 지식, 욕망, 주체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과연 물질도 인간처럼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물질에게 생태계 위기에 대해 책임도 물을 수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신유물론은 아직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니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대답을 모색하기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생각하는 언어의 문법과 논리, 체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신유물론은 휴머니즘적 에피스테메를 전환하려는 시도이다. 인간과 물질, 행위성, 능동성 등 우리가 지금까지 인간중심적으로 이해하였던 개념의 틀과 질서를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질문에 대한 대답도 낡은 기존의 틀과 질서에 갇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유물론적 시도는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물질을 발화하는 언어 자체가 근대의 인식론과 존재론, 자본주의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물질이라는 용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이고 위계적이다. 신유물론자들도 그러한 언어의 오염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신유물론도 자신이 비판하고 전복하려는 근대적 언어와 담론을 빌어서 발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유로 신유물론의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은, 전통적인 논리를 파기하는 어법이나 자기모순적이고 양가적이기도 한 대목들에 자주 직면하면서 좌절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좌절을 반복적으로 겪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사유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문체의 어려움은 새로운 깨달음에 바치는 세금이라 생각하기로 하자. 

 

 

김종갑 
건국대 몸문화연구소장/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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