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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복잡계 이론의 처세술
[학이사] 복잡계 이론의 처세술
  • 국형태 경원대
  • 승인 2002.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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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8 13:02:24
국형태 / 경원대·물리학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매순간마다 밀려드는 정보를 접하고 또한 다양한 관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전화나 인터넷같은 직접 대면하지 않는 경로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하루종일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정보와 대화가 필요하다고도 느끼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내 생활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어느 한적한 공간을 찾아 이런 번잡함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복잡한 사회에서 부대끼는 것보다 덜 피곤한 심신으로 나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 더 바람직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최근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복잡성의 과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복잡계는 그의 상태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너무 많아서 미래를 예측하기가 어려운 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닥과 벽을 이루는 바위들의 모양에 따라서 달라지는 계곡물 흐름의 다양한 양상, 계속되는 가뭄에서 갑자기 호우경보기로 바뀌어 버리는 기상예측, 또한 최근 많은 개인투자가들이 관심을 갖는 주가와 경기의 변동 등 수많은 예들이 그 범주에 든다. 서울에서 나비의 퍼덕거림이 몇 달 후 리오데자네이루에서 폭풍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나비효과’는 현재의 약간의 차이가 원인이 되어 엄청나게 다른 미래들에 귀착될 수 있는 복잡계의 비예측성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이런 비예측성은 어쩌면 우리 인생에도 적용될 수 있어서 얼마 전 어떤 TV프로그램에서 인기개그맨이 연기하였던 것처럼 어떤 순간에 결심한 두 가지의 다른 선택이 엄청나게 다른 미래를 야기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복잡계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변덕만 부리는 것은 아니다. 복잡계는 여러 가지 문양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규칙적인 상태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 문양들이 계의 균질성을 자발적으로 깨는 것들이란 점이다. 한 예를 들면 생명체의 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배아세포의 분화 과정이 보여주는 신비로움이다. 장배형성기의 배아간세포의 각 세포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들이지만 그 균질성이 깨어지고 장차 다른 조직과 기관을 이루는 다른 종류의 세포들로 발달하게 된다. 또 호랑이와 표범의 다른 무늬도 문양선택의 예가 된다.

복잡계가 보이는 또 하나의 양상은 어떤 문양을 나타내되 한 문양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문양으로 무작위하게 바뀌는 경우이다. 문양들에 자주 머문다는 점에서 비예측적인 혼돈과 다르다. 이것은 일종의 혼돈과 규칙적인 문양 상태의 중간에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잡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의 선구연구자의 하나인 랭턴(Langton)은 이 영역을 ‘혼돈의 가장자리’라고 부른다. 이 영역은 계의 상태가 매우 유동적이며서도 안정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다른 복잡계 이론의 개척자인 카우프만(Kaufman)에 의하면 생명의 진화와 생태계의 공진화는 바로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환경과 다른 종들이 변화할 때 머무르지 않고 적응하여 같이 변화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복잡계의 연구는 이러한 문양들의 발현과 변화를 조사하고 그 배후의 보편적인 법칙들을 찾는다. 복잡성의 근원으로 계의 확산성, 비선형성, 에너지 증폭, 음의 저항, 양의 되먹임, 지역적 활동성 등의 요소들이 지적되어왔다. 정성적으로 말하자면 그 조건들은 구성요소들의 지역적인 동적 활동성과 지역 간의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전파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복잡계를 우리 인간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될까. 현재까지 연구된 어떤 모형도 그것에 근접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인간사회도 분명히 복잡계의 한 예다. 따라서 복잡계에 대하여 얻어진 통찰력의 일부분은 인간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복잡성 이론에 따라서 인간사회가 다행히 혼돈의 가장자리에 있다고 할 때 나 자신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가장 이익이 될까. 다른 사람들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무리한 욕심을 버리고,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까지 잔머리를 쓰지 말고, 그렇다고 은둔할 것은 아니고 내 주위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다만 지역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뜨거운 열정에 충실히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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