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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7] “야만을 타도하라! 아나키 만세”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7] “야만을 타도하라! 아나키 만세”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7.04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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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아나키스트들
빌헬름 바이틀링
율리우스 리스케
구스타브 란다우어
요한 모스트
다니엘 콩방디트
독일 농민전쟁은 1524년에 남독일 지방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을 가리킨다. 당시 농민들은 지휘구조를 잘 갖추지 못했고, 적절한 병기 또한 갖고 있지 못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이 연재에서 보듯이 다른 나라에 비해 독일에는 아나키스트들이 압도적으로 적다. 그러나 16세기 독일 농민 전쟁을 일으킨 뮌저를 비롯하여 프리드리히 쉴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하인리히 하이네를 아나키즘의 선구자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앞에서 설명한 훔볼트나 슈티르너나 니체 등을 독일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본다. 물론 그들은 세계적 차원의 주류 아나키스트인 사회적 아나키스트라고 보기 어렵고, 그나마 사회적 아나키스트라고 볼만한 로커도 소수자의 입장이다. 

그러나 독일에는 이들 외에도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다. 선구자격인 빌헬름 바이틀링(Wilhelm Weitling, 1808~1871))을 비롯하여 상당수가 있지만 지금은 대부분 잊혀졌다. 그 중에서 우리가 알 만한 사람은 1849년 4월 드레스덴 봉기의 바리케이드에서 바쿠닌과 합께한 리햐르트 바그너이다. 그는 바쿠닌의 종말론적 비전을 공유하고 “구세계는 폐허가 되어 있고 그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했다.

빌헬름 바이틀링. 사진=위키미디어
빌헬름 바이틀링은 독일의 사회주의자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는 혁명을 전능자의 권세, 법의 권세, 재산의 권세라고 하는 '하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것'을 파괴하는 '항상 젊어지게 하며 끊임없이 창조하는 삶'으로 간주하고 공동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자연적 동맹이나 연합으로 구성된 이상적인 공동체를 요구하여 명백히 아나키스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뒤에는 변하여 아나키스트라고 보기는 어려워진다. 

 

아나키스트 vs 경찰

1848~9년 여러 독일 국가에서 혁명이 실패한 후 독일 연방이 해산되고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 국가가 통일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슈티르너나 프루동 류의 아나키스트들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제1인터내셔널 초기에 독일 대표단은 프루동과 바쿠닌에게서 영감을 받은 반권위주의 단체가 아니라 라살리와 마르크스를 지원했다. 1876~7년에 편집자 중 크로포트킨을 포함한 <노동자신문(Die Arbeiter-Zeitung)>이 베른에서 출판되었고 특히 남부 독일에서 약간의 영향을 미쳤다. 1880년대에 아나키즘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더 많은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요한 모스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한 모스트는 미국과 독일어권 아나키즘 운동의 선구자다. 사진=위키미디어

제국의회 의원이었던 모스트는 사회혁명가가 되었고 결국 정치적 망명을 강요받았다. 그는 1879년 런던에서 <자유(Freiheit)>를 출판하기 시작했지만 1882년에는 뉴욕으로 이사했다. 곧 아나키스트가 된 그는 메시지를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있는 소수의 소규모 그룹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1883년에 라인강의 루데스하임에 국립 기념관을 열었을 때 카이저와 그의 왕자들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 암살범은 사형집행을 앞두고 “야만을 타도하라! 아나키 만세!”라고 외쳤다. 

그가 처형되기 직전에 경찰관이 살해되었고 젊은 독일 아나키스트자인 율리우스 리스케(Julius Lieske)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리스케는 암살범 세 명 중 한 명이었지만 보헤미안 아나키스트인 아우구스트 페슈칸(August Peschmann)은 스스로 행동했다. 당시 아나키즘은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에서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노동운동에 깊이 스며들었다.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 노동자, 그리고 경찰 사이의 폭력적인 대립은 1884년 1월 빈에서 포위 공격이 선언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어진 탄압에서 범죄 행위에 가담한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이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아나키스트 그룹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살아남았다. 작가 야로슬라브 하체크(Jaroslav Ha:s'ek)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프라하의 보헤미안 서클에서 아나키즘에 물들었다. 카프카는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을 가장 좋아했다. 

 

란다우어의 혁명은 사회 구조가 아닌 일상의 변화

1884년 이후 독일에서 아나키스트 사상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주장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1889년경 사민당 내에서는 앞에서 본 로커나 란다우도 참여한 아나키즘 그룹이 생겨났고 유사한 모임들도 나타났다. 1923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생디칼리스트 회의에서 12만 명의 회원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생디칼리스트 운동은 나치의 집권과 함께 약화됐고, 1933년에는 독일의 다른 좌익 조직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란다우어는 학생 때 독일사회민주당(SPD)에 가입한 뒤 정치 활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의과 대학 입학이 거부당하고 1891년에 SPD에서도 축출당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노동 운동에 대한 아나키즘의 영향과 별도로, 슈티르너와 니체의 사상은 1890년대에 문학과 예술계에서 유행했다. 독일은 또한 세기 전환기에 슈티르너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아나키스트 사상가인 란다우어를 배출했음을 앞에서 보았다. <베를린 사회주의자>에 편집자로 합류한 후 그는 국가사회주의를 공격하고 유기적 공동체의 쇄신을 요구하면서 파괴가 아니라 창조를 원했다. 국가와 함께 또는 국가 밖에서 대안 커뮤니티를 개발하여 국가를 없애는 대안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무차별적인 폭력('모든 무력 행위는 독재다')에 반대했지만 혁명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혁명은 단순히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란다우어의 아나키즘은 당시에 그다지 영향력이 없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언어가 '문학적' 특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 동안 독일 아나키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에 직접 관여했다. 1918-1919년의 바이에른 혁명에서 그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바이에른을 건설하고자 하는 일주일 동안의 뮌헨 평의회 공화국에서 '교육 장관'이 되었고, 시인 뮈잠의 협조를 얻어 혁명적인 노동자평의회를 조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파견된 군대에 의해 무너지고 란다우어는 살해되었다. 살해범은 15년 노동형을 선고받았으나 1924년에 석방되었고 10년 후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나치의 대두와 함께 독일 아나키즘 운동은 끝났으나 그 대의는 루돌프 로커에 의해 계속 지속되었음을 앞에서 보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의 아나티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작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영향력 있는 아나키스트 운동이 시작되었다. 동독은 아나키즘적 반대를 허용하지 않는 공산주의 독재 아래 신음했지만, 서독에서는 60년대 초반에 신좌파가 아나키즘적 분위기를 띠었다. 60년대 후반까지 서독 학생 운동은 계급투쟁에 대한 오래된 마르크스주의 신화를 완전히 거부했고 루디 두츠케(Rudi Dutschke)라는 관료제와 국가에 대한 반권위주의 투쟁의 웅변적인 대표자를 낳았다. 

콩방디트는 23세의 낭테르대학 사회학과 학생 시절 자신을 아나키스트이자 '리버테리언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 콩방디트는 이후 독일에서 녹색당의 활동에 뛰어들었지만 리버테리안적인 젊음을 완전히 앓지 않고 계속해서 국가의 범위 내에서 더 큰 사회적 자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프랑스에서 독일 태생의 다니엘 콩방디트(Daniel Cohn-Bendit)는 1968년 반란 동안 학생 지도자가 되었고 뚜렷한 아나키스트적 입장을 취했다. 많은 독일 아나키스트와 마찬가지로 콩방디도 나중에 녹색운동에 합류했다. 독일 녹색당의 의회 진출에도 불구하고 의회 정치의 대부분을 거부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아나키즘적 '근본주의자'와 정치적 타협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 사이에 균열이 심화되어 19세기 말 독일 사회민주당의 분열을 연상하게 한다. 1989년 독일 통일은 아나키즘적 희망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희망은 아나키스트적 목적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목적으로 흘러갔다. 1990년대 초반에 민족주의와 권위주의는 독일 아나키스트 유산의 계승자라기보다 더 확실하게 눈에 띄는 망령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일에서는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영역에서도 아나키즘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밖에도 유대인으로 나치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나온 파울 첼란도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다. 청년시절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첼란은 혁명을 ‘계급의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의 문제’로 파악한 란다우어와 상호협력을 역설한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받아 모든 권위와 억압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아나키스트여야만 자유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아나키스트로 전향했다. 

그밖에도 스페인 아나키스트 두루티의 생애를 쓴 엔첸스베르크의 「스페인의 짧은 여름」이나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 페터 바이스의 「부모로부터의 작별」이나 「저항의 미학」을 비롯한 작품들, 요셉 보이스와 같은 음악가나 리히터와 같은 화가들도 아나키스트적 요소가 강하다. 독일 작가는 아니지만 같은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의 토마스 베른하르트도 아나키즘적 요소가 강한 작품을 썼고, 한스 바인가르트너Hans Weingartner 감독의 2004년 영화 「에쥬케이터(The Edukators)」도 아나키즘적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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