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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각성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각성
  • 김병희
  • 승인 2022.06.23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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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①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

글로벌 시대는 장점도 있지만 각국의 고유한 문화를 해체하고 서구 위주의 문화적 동질화를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문제다. 앞으로도 글로벌 시대가 계속될 텐데, 100년이 지난 다음에 ‘한국적인’ 것이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지 의문이다. 그때 가서 후손들은 우리 고유의 문화적 흔적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단언컨대,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현암사, 1963)를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2월 26일, 이어령(1934~2022) 전 문화부장관이 별세했다. 많은 분들이 고인을 추모했던 상황에서, 그의 청년 시절로 되돌아가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1956년, 24살의 이어령은 「우상의 파괴」라는 평론에서 서정주, 황순원, 김동리, 조연현 같은 당시 문학계의 거물들을 우상이라고 비판하며 신예 비평가로 등장한 이후, 사망할 때까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지성의 담론을 제시해왔다.

『흙속에 저 바람 속에』는 29살의 청년 이어령이 1963년 8월 12일부터 10월 24일까지 <경향신문>에 50회 연재했던 원고를 모아 출간한 것이다. ‘한국의 문화 풍토’에 대한 글 연재를 요청받은 그는 ‘풍토(風土)’라는 딱딱한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꿔보려고 시도했다. 낡은 개념어인 ‘풍(風)’과 ‘토(土)’를 토착어인 바람과 흙으로 대체하고, 단어의 순서를 바꿨다. 그리고 바람 앞에 ‘저’라는 지시대명사를 넣으니 풍토라는 한자어 굳은살에서 새살이 돋아나듯 감각적인 한글 제목이 탄생했다. 

현암사의 광고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조선일보, 1964. 1. 12.)

1963년 12월 15일에 초판이 나오자, 한국 문화를 제대로 분석해낸 기념비적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곧바로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책 출간을 알리는 첫 광고(조선일보, 1964. 1. 12.)의 헤드라인은 이렇다. “공전의 초 베스트 셀러! 발매 2주에 당당 5판 돌입! 4판 발매 중.” 이어지는 보디카피는 다음과 같다. “보라! 젊은 한국 지성의 선봉 이어령 교수가 그의 해박한 지식, 알찬 교양, 넘쳐흐르는 유머, 폐부(肺腑)를 찌르는 싸타이어로 빚어낸 지혜의 알맹이를.........” 여기에서 ‘싸타이어’란 풍자와 해학을 뜻하는 세타이어(satire)의 당시 표기법이니, 마음속을 찌르는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책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던 셈이다.

당시에 출판된 책 광고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이 광고에서도 명사들의 추천사를 광고 카피로 채택했다. 문학평론가 백철 교수는 “경이와 감명의 문장”이라고, 지명관 서울대 교수는 “눈물겨운 자기 고발”이라고, 언론인 송건호 선생은 “한국 연구의 문헌적 자료”라고, 장용학 소설가는 “한국의 재발견”이라고, 문덕수 시인은 “한국의 자화상”이라고 평가하며, 이 책을 독자들에게 권했다. 330쪽 분량에 책값은 220원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책에서는 저자의 한글 이름을 이어령이 아닌 ‘이어영’으로 썼다.

“이것이 한국이다”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출간 1년 만에 30만부가 팔렸고 이후에도 3개 출판사를 거치며, 지금까지 한 번도 절판되지 않고 250만부 넘게 팔린 최장기 스테디셀러이다. 해외에서도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 등 6개 국어로 번역됐고, 이어령 전집 30권의 씨앗이 이 책 밭에 처음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흙속에 저 바람 속에』의 개정판은 2008년에 문학사상사에서 출간돼 오늘에 이르렀다.

세로 읽기 2단으로 편집되고 한자가 많이 혼용돼 있는 『흙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 문명론의 시금석을 제시한 책이자 한국 최초의 ‘한국인론’을 제시한 명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예컨대, “울음에 대하여”, “굶주림의 그늘”, “장죽(長竹) 유감”, “기차와 반항”, “시집살이의 사회학”, “서낭당 고개에 서서” 같은 에세이를 보라!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한국 문화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저자의 혜안에 놀랄 뿐이다. 한국인의 생활에 뿌리박힌 전통적인 정서와 문화를 깊이 있게 엿볼 수 있다. 울음, 한복, 숭늉, 굶주림, 윷놀이, 돌담, 하얀 옷, 끼리끼리 같은 친근한 소재를 끌어들여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특성을 통렬하게 파헤쳤다. 좌절감과 열등의식에 빠져있던 1960년대의 한국인들에게 민족적 긍지와 정체성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흙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맛있는 말맛은 ‘저’라는 지시대명사에 있었다. 바람 앞에 ‘저’가 삽입되자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을 눈여겨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좌절감과 열등의식에 빠져있던 1960년대 한국인들에게 ‘우리 것’이 정녕 소중하다며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들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나아가 흙과 바람 속에 우리들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운명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서울대를 졸업하고 한양대 광고홍보학과에서 광고학 박사를 했다. 한국광고학회 제24대 회장과 한국PR학회 제15대 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디지털 시대의 광고 마케팅 기상도』(학지사, 2021),「광고의 새로운 정의와 범위: 혼합연구방법의 적용」(2013) 등이 있다. 한국갤럽학술상 대상(2011), 제1회 제일기획학술상 저술 부문 대상(2012), 교육부·한국연구재단의 우수 연구자 50인(2017) 등을 수상했고, 정부의 정책 소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2019)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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