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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순수유감
학이사: 순수유감
  • 정만영 서울산업대
  • 승인 2006.01.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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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영/서울산업대·건축학

건축과에 와서 수강하는 조형대 학생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한 학생에게 수강이유를 물어보니, 건축도 예술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자신은 건축을 어떻게 봐야 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수강하게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중고 시절부터 비교적 예술과 많이 접해온 이들조차 건축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은 예술교육이 순수예술에 편중되어 있어서, 다른 영역의 예술체험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건축은 인간의 삶에 전체적으로 관여한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건축에서 벗어난 삶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축은 인간의 일상에 밀착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도시를 여행할 때,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대부분 건축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에 회화나 조각은 건축과 달리 일상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이 현상은 전시공간이 건물유형으로 일반화된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1737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최초 개관) 그 이전의 예술작품은 전시공간에서 독립적으로 감상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건축의 일부로서 감상되었다. 공공적 전시공간의 탄생과 더불어 회화와 조각은, 건축과 일상에서 벗어나 공간적으로 격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일상적 목적이 배제된 미적 순수성이라는 자립적 세계를 구축했다. 공간적 격리와 미적 순수성은 근대미학을 출현시킨 배경인 셈이다.

칸트의 미학은 ‘목적 없음의 합목적성’이라는 절묘한 논리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필요와 사용목적에서 벗어날수록 예술 고유의 자유로움과 순수함에 가까워진다는 구도와 이에 따른 실용/순수예술의 위계화에는 고대 그리스 노예제의 흔적이 투영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필수적이고 유용한 것을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에 대비시키고, 전자는 노예에게 후자는 시민에게 할당했다. 사용하기 위한 실용적 지식과 지식 자체가 목적인 자유로운 지식으로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가멸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담당하는 노예와 일상에서 벗어나 정신적 자유를 향유하는 자유인을 구분한 사회제도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일상적 용도를 배제한 순수함과 자유로움에 대한 욕망은 그 바탕이 되는 일상과 현실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가운데 성립한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만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유용한 것은 모두 추하다”(테오필 고티에, ‘모팽 아가씨’ 서문, 1835)라는 순수성의 미학은 일상에 대한 혐오감을 전제하고 있다. 문제는 사회적 제도가 전혀 다른 18,19세기 심지어는 지금까지 미학에서 이 구도가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미학이나 예술이 일상적인 지각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되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한 예비적 단계여야 한다. 즉 그것은 일상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에 깊숙이 참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중국 송대의 선사였던 청원 유신의 법어는 좋은 참조점을 제시해 준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각행의 산은 같은 것이 아니다. 부정의 단계를 거쳐 3행에서 다시 확인되는 산은, 처음에 확인된 바로 그 산이지만, 같은 수준의 산이 아니라 다시 각성된 산이다. 이미 익숙한 것을 각성을 통해 다시 그것으로 확인하는 체험은 일상에 대한 지각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예술의 귀결은 ‘아니다’라는 부정적 계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각성된 일상에 있어야 한다. 예술을 통해 일상에 대한 지각이 강화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건축은 일상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일상을 형성하는 골격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건축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상을 배제한 순수미학의 왜곡부터 교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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