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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3] 대학·사민당·인터네셔널에서 추방당한 꾸밈없는 순교자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3] 대학·사민당·인터네셔널에서 추방당한 꾸밈없는 순교자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6.0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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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슈티르너
바쿠닌
쿠르트 아이스너
구스타프 란다우어는 구스타프 노스케 국방장관이 베를린에서 파견한 1만 명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여파로 란다우어는 뮌헨에서 구타를 당하고 살해되었다.  사진=위키미디어

19세기 말 독일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압도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대담하고 독창적인 사상가들이 아나키즘에 끌렸다. 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는 불리한 정치 환경에서 투쟁하다가 그의 활동과 견해 때문에 살해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란다우어의 친구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나 요한 모스트(Johann Most)와 루돌프 로커(Rudolf Rocker)와 같은 사람들은 강제로 해외로 이주돼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장 프로포지에의 『아나키즘의 역사』에서는 그들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프로포지에가 프랑스인이어서 독일 아나키즘을 무시한 탓이다.

슈티르너 이후 가장 중요한 독일 아나키스트인 란다우어는 1870년 독일 남부 카를스루에(Karlsruhe)의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생 때 독일사회민주당(SPD)에 가입한 뒤 정치 활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의과 대학 입학이 거부당하고 1891년에 SPD에서도 축출당했다. 2년 후 그는 아나키스트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을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며 당시 유행하던 슈티르너주의와는 선을 그었다.

란다우어와 함께 제2 인터내셔널에서 추방당한 로자 룩셈부르크. 사진=위키미디어

그는 1892년부터 베를린 아나키스트 신문인 <사회주의자>(Der Sozialist)를 편집했지만 그 부제를 ‘아나키즘-사회주의를 위한 기관’(Organ fiir Anarchismus-Sozialismus)으로 변경하여 아나키즘의 사회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의 아나키즘적 성격을 강조했다. 란다우어는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했지만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등과 함께 제2인터내셔널의 취리히 대회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1896년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인터네셔널에 말라테스타와 함께 참석하여 아나키스트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국가사회주의, 즉 위로부터의 관료주의이다. 우리가 옹호하는 것은 자유로운 조직과 연대, 권위의 부재, 모든 속박에서 해방된 마음, 모든 사람의 독립 및 복지이다. 누구보다 먼저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관용을 설파한다. 그들의 의견이 옳든 그르든, 우리는 그들을 강제로 부수고 싶지 않다.” 

 

린다우어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은 머릿속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도 추방되었다. 그후 그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독일 관념론적 전통에 뿌리를 둔 신비주의적 아나키즘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는 ‘민중’(Volk)이란 말이 독일의 언어, 문화, 관습을 국가와 구별하여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란다우어는 아직 결속되지 않았을 뿐이어서 더 높은 유기체가 아닌 Volk의 잠재적인 통일성을 실현하고 실재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발전시키기를 원했다. 그는 또한 Volk를 국제주의의 장애물이 아니라 디딤돌로 보았다. 이것은 란다우어의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배타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이지 않은 민족주의의 토대를 마련한다. 그는 국가 없이 Volk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국가에 대한 그의 중요한 반대 중 하나는 국가가 Volk의 유기적 통합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반면 각 Volk는 공통된 인류애에 독특하고 가치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

란다우어는 슈티르너가 말한 개인주의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원자론적이고 뿌리 봅힌 개인주의를 거부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란다우어에게 공동체는 그것을 단순히 개인의 통합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사회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유한 이해관계가 있는 유기적인 전체다. 란다우어에 따르면, 슈티르너의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은 머리속의 환상인 신화에 불과하다. 각 개인은 물리적, 영적 의미에서 자신의 지역 공동체뿐만 아니라 나머지 인류와도 결합돼 있다. “개인적 유기체는 하나의 거대하고 참된 물리적 공동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개인의 영혼도 하나의 거대하고 참된 물리적 공동체의 일부이다.” 그러나 란다우어는 슈티르너가 말한 개인주의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원자론적이고 뿌리 뽑힌 개인주의를 거부했다고 봄이 옳다. 

란다우어는 혁명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수단과 목적의 동일성과 현재의 도덕적 행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폭력적인 혁명과 개별적인 테러 행위에 완전히 반대한 그는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의 가장 큰 오류는 ‘권력을 통해 무권력이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모든 무력 행위는 독재다.” 란다우어에게 아나키 상태는 더 많은 전쟁과 살인이 아니라 영적 재생을 수반해야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더 높은 형태의 인간 사회로 가는 길은 우리의 본능과 우리 영혼의 절대권력이라는 어둡고 운명적인 문, 즉 우리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부에서 외부로만 세계가 형성될 수 있다.” 

 

혁명은 강제적 사회에 대한 평화적인 거부와 대안적 제도의 창출이다

란다우어는 혁명에서 ‘사랑을 통한 결속력에 의해 긍정적인 결합의 이미지와 감정’이 높아지지만 정치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란다우어에 의하면 이는 긍정적인 대안을 만들기 위해 기존 국가 및 그 제도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는 각 개인의 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권위에 대한 심각한 의존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자기 관리 공동체와 협동조합의 발전을 촉구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계급투쟁을 비판하고 권위에 대한 톨스토이의 수동적 저항과 결합 된 협동조합의 건설로 ‘직접행동’을 보았다.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의 만병통치약인 ‘총파업’은 도구의 쇠퇴가 아니라 노동자 통제하에 있는 노동의 재편이어야 한다고 했다.

란다우어는 혁명을 폭력적인 대격변이 아니라 강제적 사회에 대한 평화적인 거부와 대안적 제도의 점진적인 창출로 보게 됐다. 그는 바쿠닌에 대한 소책자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결국, 그는 혁명을 폭력적인 대격변이 아니라 강제적 사회에 대한 평화적인 거부와 대안적 제도의 점진적인 창출로 보게 되었다. 산업적 도시주의를 거부하면서 그는 노동자들을 토지로 돌려보내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의 쇄신을 촉구했다. 비록, 란다우어가 막스 네틀라우(Max Netdau)의 바쿠닌(Bakunin)에 대한 소책자의 서문을 썼지만, 그의 성숙한 아나키즘은 프루동과 크로포트킨의 저작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그들의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프루동을 모든 사회주의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겼고 상호 신용과 교환을 위한 그의 계획을 자유롭게 채택했다. 그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소유(개인, 공동체, 협동조합)가 풍부해야 한다고 제안함으로써 개인의 재산 소유와 상호주의적 협력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각 공동체의 구성원은 다양한 소유 형태 간의 올바른 균형을 주기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본 란다우어는 크로포트킨의 『상호 협력』을 번역했으며 그의 『들판, 공장 및 작업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크로포트킨과 마찬가지로 그는 농업과 산업을 소규모로 결합한 지역 및 지역 공동체의 경제적 독립을 촉진했다. 그는 국가 안에 갇혀 있는 창의적이고 유기적인 정신을 해방하기 위해 지역 공동체의 연합을 옹호했다. 산업과 농업의 통합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비전을 공유하면서 그는 토지로의 귀환을 더욱 끈질기게 요구했다. 나아가 란다우어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토지를 위한 투쟁이다. 사회적 문제는 농업적 질문이다.”라고 했다. 란다우어는 진정한 공동체를 토지와 동일시함으로써 도시 기반의 생디컬리즘에 등을 돌렸다. 

 

영웅이 아닌 올바른 삶의 본보기가 될 꾸밈없는 순교자

그러나 란다우어의 철학적 이상주의는 궁극적으로 과학적 사고를 지닌 크로포트킨에서 벗어났다. 그는 상호협력에 대한 자신의 강조점을 공유했으나 말라테스타처럼 그것이 인간 사회에서 작용하는 자연법칙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는 이성이나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영적 자각에 주목했다. 그는 당대의 독일인들이 가장 복종적인 주체로, 자발적인 노예에 대한 라 보에티에의 개념을 너무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권위주의 국가는 외부적으로 부과된 폭정보다 인간의 수동성 때문에 존재한다고 본 그는 독일 노동계급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었고 그 땅에 모범적인 협동조합 정착촌을 건설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란다우어는 바이에른 공화국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친구 쿠르트 아이스너의 초청으로 뮌헨으로 가 자기 관리 공동체 사회라는 이상을 밝히기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는 제1차 대전 전부터 사회주의 운동권에서 소외되었고 특히 전쟁에 반대하여 많은 증오를 낳았다. 1912년에 ‘전쟁은 권력, 살인, 강도의 행위로, 국가의 가장 날카롭고 분명한 표현이다’라고 썼음에도 1918년 11월, 그는 바이에른 공화국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친구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의 초청으로 뮌헨으로 가서 연방주의적이고 분권화된 자기 관리 공동체 사회라는 자신의 이상을 창조하기 위해 혁명노동자위원회와 중앙노동자위원회의 멤버로 투쟁에 참여했다. 

아이스너가 암살된 후 란다우어는 1919년 4월에 선언된 단명한 뮌헨 평의회 공화국의 '내각'에서 교육 장관이 되어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란다우어는 시인 에리히 뮈잠(Erich Miihsam), 에른스트 톨러(Ernst Toiler, 러다이트에 관한 희곡의 작가), 레트 마루트(Ret Marut, 나중에 작가 B. Traven이 됨)과 함께 일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아나키즘 교육을 제공하려는 란다우어의 프로그램은 실현되지 않았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공화국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축출되고 혁명은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 국방장관이 베를린에서 파견한 1만 명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여파로 란다우어는 뮌헨에서 구타를 당하고 살해되었다. 

장교가 그의 얼굴을 폭행하고 “더러운 빨갱이놈, 죽여라!”라고 외치자 그는 “그럼 나를 죽여라!”, “스스로 인간으로 생각하라!”라고 외쳤다. 총알 세례가 퍼부어졌고 그는 죽을 때까지 짓밟혔다. 그리고 시체를 벗겨서 세면대에 던졌다. 겸손한 평화주의자는 이제 막 49세가 되었었다. 뮌헨의 아나키스트 생디칼리스트 연합은 노동자들의 기부로 그의 비명을 사용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이제는 영웅이 아닌 다른 종류의 순교자를 낳아야 할 때다. 올바른 삶의 본보기가 될 조용하고 꾸밈없는 순교자다.” 그러나 그것은 히틀러 집권 후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마르틴 부버를 통해 란다우어는 이스라엘 공동체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기존 사회를 거부하고 대안적 제도를 만들라는 그의 외침은 1960-70년대의 반문화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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