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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 진리는 없다…다원주의와 소극적 자유
유일 진리는 없다…다원주의와 소극적 자유
  • 김재호
  • 승인 2022.05.31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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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⑥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 7일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철학)가 「자유, 다원주의, 상대주의」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7강은 김현섭 서울대 교수(철학과)의 「자유와 정의: 자유주의적 정의론」, 제8강은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실존과 자유」, 제9강은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철학과)의 「분별심으로부터의 자유: 불교의 깨달음과 해탈」, 제10강은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철학)의 「도가의 자유관」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처지는 각각이지만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는 있어
보편 타당한 최고선은 없지만 최소 보편성은 존재

자유주의자들은 다원주의를 자유주의의 한 지파(支派) 정도로 간주한다. 그러나 다원주의자들은 두 사조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확신에 차 자기 주장을 펴고 심지어 사실까지 왜곡하는 현실 앞에서 다원주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는 이사야 벌린 철학을 통해, 다원주의와 최소 보편성을 강조했다. 다원주의는 개별 가치들의 양립·비교·통약 불가능을 전제로 한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이사야 벌린(1909∼1997)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면서 다원주의적 문제의식을 개척했다. 벌린의 다원주의는 다음 세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양립 불가능이다. 조용한 명상을 즐기는 사람이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을까? 넓이와 깊이, 자유와 평등, 원칙주의와 동정심이 모순되듯이, 가치들은 서로 모순될 수 있다. 둘째, 비교 불가능이다. 셋째, 통약 불가능이다. 가치들을 상호 평가하기 위한 공통 표준이 없는 상황을 말한다. 

벌린은 궁극적 가치나 목적들이 서로 충돌할 때 그런 갈등을 명쾌하게 정리해줄 ‘최종 진리’를 원칙적으로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동등하게 궁극적인 목적들과 동등하게 절대적인 요구들’이 서로 충돌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방법은 ‘하나를 실현하면 다른 것이 불가피하게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두고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를 고르면 그 대가로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벌린의 다원주의는 그의 독특한 ‘소극적 자유론’과 그 맥이 닿아 있다. 벌린은 외부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로 간주한다. 자유를 가로막는 것의 실체를 외부의 간섭이나 방해로 한정한다면 오직 소극적 자유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벌린은 다원주의와 소극적 자유가 인간적 상황을 넘어가는 데 최선의 방책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을 넘어 유일 진리 따위에 대해 환상을 가진다는 것(적극적 자유)은 형이상학적 오만이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덕적, 정치적 미숙(未熟)’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다원주의는 회의주의를 품는 반면 허무주의는 배척한다.

벌린은 결정론과 상대주의라는 두 신조가 현대의 사유 세계에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우려했다. 그가 볼 때, 둘 중 어느 것도 인간 경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상대주의자들은 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맥락의 흡인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벌린은 다원주의자답게 문화 상대주의의 논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 한편, 경계를 가로질러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 처지는 다를 수 있지만 그 어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차이가 언제나 큰 것은 아니다. 인간을 한데 묶는 객관적 가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적 합리성 비판, 객관적 이성은 신뢰

서병훈 교수는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를 비교하며, 최소 보편성과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다원주의는 다른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는 특정 가치, 특히 ‘좋은 삶’에 관한 특정 관점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는 분명 자유와 개인의 자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상정하고 있다. 다원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다양한 삶의 형태 중 하나로 치부하며 그 어떤 보편적 우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벌린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를 비판했지만 동시에 윤리와 가치에서 객관적 이성의 위치를 확고하게 신뢰했다. 

벌린은 선험적으로 확고한 도덕 관념은 부정했다. 그는 보편적으로 타당한 최고선을 모색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적 상황에서 무엇이 가장 나쁜 것인지 찾아내는 일에는 자신감을 가졌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가치 판단하기 위해 반드시 보편적 가치 체계를 갖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모호하기는 하지만 벌린은 공통 인간 지평이라는 개념 아래 다원주의가 ‘최소 보편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벌린은 자율적 주체가 추구하는 삶보다 훨씬 다양한 가치 있는 삶을 명시적으로 인정한다.

벌린의 다원주의는 최소 보편성을 놓고 고민한다. 일원론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기본 도덕률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구체화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벌린은 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의 공통 지평을 상정했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은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벌린의 최소 보편성을 민주주의 사회에 맞게 재구성하기 위해 두 차원으로 나누어 접근해보자. 우선 사적 영역은 각 개인의 자율적 선택에 맡겨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해악의 원칙(harm principle)’에 입각하여,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어떤 선택이든 허용한다. 문제는 공적 영역, 특히 국가의 역할이다. 평등한 자유를 전제로 인간의 행복(human flourishing)을 추구하는 것이 공적 영역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 

벌린은 역사가가 경험적 증거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사실에 모종의 폭행을 가하는 셈’이라고 엄중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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