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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1] 노동·협동·소비자조합 처럼 자발적으로 연합 된 사회를 꿈꾼, 슈티르너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1] 노동·협동·소비자조합 처럼 자발적으로 연합 된 사회를 꿈꾼, 슈티르너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5.23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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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의 평가와 영향
슈티르너는 사회를 대망했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란 전통적인 가족이나 고향 같은 공동체나 국가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진=위키미디어

20세기 후반기는 물론 21세기의 현대적인 아나키스트들이 가장 고전적인 아나키스트인 막스 슈티르너에게서 주된 영감을 받고 있음은 아이러니한 일이고 주목할 만한 일이다. 슈티르너에 이어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이나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을 풍미한 것과 대조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운동이나 사상의 차원만이 아니라 학문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슈티르너를 미국식 자본주의 아나키즘과 동일시하거나 그를 사회성이 없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 보는 점에는 반대한다. 그를 프루동이나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같은 사회적 아나키스트로 보기는 어렵다고 해도, 그는 사회를 무시하기는커녕 새로운 사회를 대망했음을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새로운 사회라고 함은 전통적인 가족이나 고향 같은 공동체나,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나 회사 같은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하여 만드는 노동조합·협동조합·소비자조합과 같은 조합 사회를 말한다. 

이러한 조합 사회는 전통적인 공동체나 제도를 변혁하는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조합과 같은 국가나 회사, 조합과 같은 가족이나 고향 같은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자유로운 개인이 자치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나키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다만 나는 이에 더해 자연과의 조화를 주장하지만 19세기 초의 슈티르너에게는 자연이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과 정치비평에서 온 인간의 해방

슈티르너는 ‘이기주의자’라고 번역되는 egoist라기보다는 ‘개인주의자’(individualist)라고 함이 더 적절하지만, 그의 개인주의는 최근 미국에서 트럼프를 최고의 개인주의자라고 부르는 경우와는 다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반대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에게 국가는 개인의 저주 대상이다. 그러나 국가를 저주하는 것은 독특한 일이 아니다. 국가를 ‘자유 박탈’, ‘계급적 압제’, ‘신의 뜻이나 정의에 위반’, ‘환경 파괴’, ‘민족·인종 등의 억압’ 등으로 비난하는 사례는 흔하다. 그런데 그러한 비난들은 이상적 차원에서 국가를 저주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이상의 전개를 국가가 방해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슈티르너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기 때문에 저주한다.

슈티르너는 개인과 보편성이라는 두 가지 반대 방향을 구별한다. 한쪽에는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요구하는 개인이 있고, 다른 쪽에는 평등에 대해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보편성이 있다. 그렇다면 양측이 ‘자유’를 정의하는 방식은 얼마나 다를까? 개인은 자신을 지배하는 권력에서 벗어나려 하고, 자기의 행동이 방해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 반면에 보편성은 그것이 무한할 때 자유를 갖는다. 예를 들어 베트남은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베트남의 개인들은 새롭고 더 엄격한 주인에게 지배당하고 새로운 권력에 저항하면 제국주의 시절처럼 처벌당한다. 한반도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중동의 경우 정치적 변화에도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와 같은 개인은 목숨을 걸고 두려워해야 한다. 

슈티르너는 ‘인간’ 해방의 세 단계를 설명한다. 첫 번째는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두 가지는 슈티르너와 동시대인 정치 비평에서 나온 것들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슈티르너는 ‘인간’ 해방의 세 단계를 설명한다. 첫 번째는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두 가지는 슈티르너와 동시대인 정치 비평에서 나온 것들이다. 1789년 혁명 중에 개인의 권력은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다. 그 누구도 개인으로서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됐다. 모두가 국가의 시민이었다. 이를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의 해방으로 찬양되었으나, 사실은 모든 개인적 이해관계를 가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존재(슈티르너가 말하는 에고이스트)의 해방이 아니었기 때문에 1789년 혁명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특히, 재산의 분배는 극소수의 가진 자를 대다수의 가지지 못한 자들로부터 보호하는 국가에 의해 통제되어야 했다. 

재산은 부정적 차원의 이기주의자라는 의미의 에고이스트들에게 맡겨지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인간이나 인류의 통제 아래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인간을 해방시키려면 이기주의자들이 재산에 대해 얻은 권력을 제거하고 인류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것이 공산주의 또는 사회적 자유주의의 주장이다. 그러나 사회적 자유주의에서도 여가시간이 여전히 사적인 이익을 위해, 즉 이기주의를 위해 남겨졌다. 따라서 사악한 이기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인간이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가시간도 ‘인간적’이 되어야 했다. 모든 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조직되어야 하며 모든 소유와 개인적인 이익은 제거되어야 했다. 

 

‘자유 국가’란 있을 수 없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사진=위키미디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슈티르너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찾지 못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와 사회를 뚜렷이 구분하고, 후자의 평화롭고 생산적인 발전을 위해 전자를 거부하지만, 슈티르너는 기존의 형태로 국가와 사회 모두를 거부한다. 그는 국가가 나의 충성과 숭배를 요구하는 ‘고정 사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것은 나의 개성과 관심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이것의 유일한 목적은 항상 ‘개인을 제한하고 길들이고 종속시키는 것 - 어떤 일반성이나 다른 것의 복종이 되게 하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루소에게 그토록 소중한 주권과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찾지 못한다. 국가가 통치권과 법률을 제정할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주권자의 의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에고만이 주권에 대한 주장을 갖는다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비록 모든 개인이 같은 의지를 표명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해도, 국가가 시행하는 어떤 법도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도록 하는 의지를 동결시킬 것이다. 다수결의 원칙에 입각한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절대군주제와 같은 입장에 있는 반대파 소수파를 남겨둔다. 주권은 필연적으로 지배와 굴종을 수반하기 때문에, 슈티르너는 ‘자유 국가’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사회계약 이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의심할 여지없이 고드윈의 비판만큼이나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슈티르너가 상호 관심에서 도출된 자발적 연합의 새로운 사회를 대망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자본주의나 그것의 배후에 있는 개신교 윤리와는 무관하다고 본 점도 분명하다. 따라서 그를 자본주의자로 말하는 미국식 아나키스트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오도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도 그런 논자들이 있음은 우리의 아나키즘 이해가 얼마나 천박한 수준인지를 잘 보여준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독일 시인 존-헨리 멕케이(John-Henry Mackay)는 슈티르너를 알리는데 힘썼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그는 슈티르너를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슈티르너는 맥케이와 같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미하일 바쿠닌과 같은 사회 아나키스트도 막스 슈티르너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존-헨리 멕케이. 사진=위키미디어
존-헨리 멕케이. 사진=위키미디어

슈티르너는 20세기의 전환기에 두 번째 명성을 얻었다. 게오르크 브란데스는 그를 발견하고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소개했다. 니체의 팬들은 니체의 ‘선구자’를 슈티르너에서 찾았다. 따라서 브란데스는 1902년에 『유일자와 그 소유』의 덴마크어판 출판하고 서문을 썼을 때 시장을 개척했다. 헨릭 입센(Henrik Ibsen)은 브란데스와 자주 연락했고, 따라서 입센이 슈티르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슈티르너의 공격은 페미니스트나 가부장주의자 모두가 가정하는 성역할에 대한 비판을 비롯하여 모든 현대적 인권 논의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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