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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주체의 위기 혹은 확장 : 포스트-디지털의 재분지화
[디자인 파노라마] 주체의 위기 혹은 확장 : 포스트-디지털의 재분지화
  • 유원준
  • 승인 2022.05.27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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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⑲_유원준 영남대 디자인미술대학 교수
[사진1] 2018년 전통 음악과의 융합을 시도한 ‘하츠네 미쿠 X KODO’ 콘서트 포스터. 사진=크립톤 퓨처 미디어·세가
2018년 전통 음악과의 융합을 시도한 ‘하츠네 미쿠 X KODO’ 콘서트 포스터. 사진=크립톤 퓨처 미디어·세가

멋지거나 멋지지 않거나, 디지털의 분절

“이 멋진 새로운 세계여!”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주인공 미란다는 자신이 12년 동안이나 갇혀있던 섬을 떠나며 위와 같이 외친다. 그녀가 이제 마주할 문명 세계는 이전까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멋지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찰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말이다. 아마도 우리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의 기대와 희망 또한 미란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로직과는 매우 다른, 무언가 빠르고 쾌적하며 편리한 새로운 기술에 관한 기대는 매우 강력했다. TV와 영화에서는 디지털이 그리는 신세계에 관한 유토피아적 예견이 앞다투어 그려지고 있었고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오브제들을 만날 때마다 기존 세계가 제공해주지 못한 신-기능에 경탄했다. 우리의 삶은 빠른 속도로 0과 1의 이진법 코드로 대체되었으며 디지털의 속성이 시대의 미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미란다가 새로운 문명 세계를 경험한 이후에도 그녀가 처음 외쳤던 ‘멋진 신세계’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기술 문명들이 우리에게 과거와는 다른 편리함을 제공해주었지만, 그것에 도취된 우리들의 모습이 과연 멋진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을까.

소설가 헉슬리(Aldous Huxley)는 미란다의 위의 외침을 인용해 1932년 자신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발표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우리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묘사한, 기술·미디어에 의해 발전한 미래의 문명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따라서 작품의 제목 역시 역설적 의미를 담고 있다. 소설 속의 미래는 감정까지 조종되는 정밀하게 계산된 유토피아적 세계이지만 결코 완벽히 통제되는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디지털 기술은 분명 매우 멋진 경험을 선사해주고 있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멋진 삶 자체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며, 앞서 묘사한 일상의 장면처럼 결국 그러한 기술에 의존하며 자위하는 쳇바퀴 속 다람쥐로 우리를 유비해 버릴 수도 있음을 짐작게 한다.

이쯤 되면, 디지털의 속성이 무엇이건대 이렇듯 우리 삶의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는지 다시금 곰 씹어 보게 된다. 디지털은 이전법 코드로 구성되는 일련의 분절화다. 모든 정보를 0과 1의 성분으로 변환하여 체계화하기 때문에 이전의 정보 방식 및 존재 형태와는 다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근본적 성격과 성질 덕택에 디지털은 과거 아날로그와 구분되는 특성을 부여받는다. 많은 정보를 짧은 시간에 해석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시 병렬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 또한 서로 다른 특성을 보인 것들 역시 0과 1의 체계로 귀속되므로 그들 사이의 자유로운 왕복이 가능해졌다. 우리의 미디어가 멀티미디어로 진화하는 근본적 요인이 여기에 있다.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Rozy)’의 SNS 계정. 사진=로지 인스타그램 갈무리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Rozy)’의 SNS 계정. 사진=로지 인스타그램 갈무리

하츠네 미쿠와 싸이 그리고 로지에 이르기까지

최근 다양한 분야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인 ‘메타버스(Metaverse)’는 ‘저 너머’라는 뜻의 그리스어 ‘메타(meta)’와 ‘세계·우주(universe)’의 합성어이다. 주지하다시피 1992년 닐 스티븐슨의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이 단어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3차원 현실에서 구현된 가상 세계를 의미한다. 디지털의 영역 안에서 아니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원시시대의 동굴벽화에서부터 구현된 가상 세계는 이미 우리의 환경에서 발견됐던 혹은 발생했던 요소였다. 그러나 최근 이 단어는 단지 기술적 세계나 단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듯하다. ‘내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가 아닐 수 있다’라는 다른 가능성의 지평, 철학적으로는 동일성으로 귀결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에서 환원되는 하나의 현상이 메타버스라는 말에 집중된다.

‘하츠네 미쿠’는 많은 이들이 열광해오던 가상의 캐릭터였다. (물론 현재까지도)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통해 목소리마저 인공적으로 직조된 이 캐릭터는 역설적으로 현실과의 대척점에서 기능했다. 마니아들은 그의 몸짓과 목소리에 매료됐으며 대중들은 이러한 낯선 조합에 기대와 우려가 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의 캐릭터는 현실적 존재와의 컨버전된 형태로 대중들에게 친숙해졌다. 가령 유명 가수인 ‘싸이’의 경우를 떠올려 볼 수 있는데, ‘강남스타일’로 전 세계를 열광시킨 후 그의 공연은 홀로그램으로 제작되어 현실의 존재가 가상적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적절히 보여줬다. 이러한 문화적 콘텐츠의 연계는 가상적 존재와 현실적 존재의 강렬한 대비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애니메이션 캐릭터였던 하츠네 미쿠의 모습은 너무나도 가상적인 스타일로 귀결되었던 것에 반해 싸이는 실제(?) 가수의 모습을 최대한 닮게 만들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화-가상화의 노선의 끝엔 ‘버추얼 휴먼(인플루언서)’인 ‘로지’가 있다. 순수한 가상적 생명체이면서도 현실에 분명 존재할 것만 같은 이 존재는 이전의 캐릭터들이 현실과 가상 중 한쪽 세계에 무게 중심을 놓고 있는 것에 반하여 두 세계에 굳건히 연결한다. 만약 이러한 문화적 콘텐츠의 연결을 선형적 진화의 의미로 이해해보면 마치 ‘VR-AR-MR’에 이르는 기술적 단계와 그것이 지니는 의미의 심화 과정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완전히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했던 초기 가상(현실)의 세계를 지나 현실에 가상을 투영시키는 증강된 현실이 우리를 찾아왔으며 현재 이러한 레이어들이 중첩된 채 혼성적으로 존재하는 혼합현실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만약 이러한 궤도에서 나름의 진화적 요소를 찾아본다면 어떠한 지점에서 발견될까? 디지털이 만들어낸 인공적이며 적극적인 가상의 환경은 왜 다시금 기존의 현실, 즉 아날로그적 요소들을 추출하여 자신의 양분으로 삼고 있을까? 최근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부캐’와 다중정체성 더 나아가 메타버스로 점철되는 다른 세계로의 지향은 일종의 환상일까? 아니면 진지한 현실의 성찰이 될까?

 

유원준 영남대 디자인미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이자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AliceOn)의 설립자다. 과학·기술 매체와 예술 융합의 다양한 지점에 관해 연구하고 있으며 영화와 게임, 만화와 공연 예술 등 전통적인 미술(시각예술)의 범주를 넘어 문화 예술 콘텐츠 전반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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