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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와 소통하는 몸 운동의 가장 오래된 표현, 예술
외부와 소통하는 몸 운동의 가장 오래된 표현, 예술
  • 김봉억
  • 승인 2022.05.20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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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 첨단연구의 현장 ‘체화된 마음 연구’ ⑧ 체화된 인지와 예술

 

<교수신문>은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융복합 연구가 강조되고 있는 가운데, 첨단연구의 현장을 찾아 지식생산의 새로운 흐름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체화된 마음 연구 : 몸-뇌-세계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를 연구하고 있는 ‘체화인지연구단’이다. 체화인지연구단은 최근 인지과학 분야에서 마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는 ‘체화된 마음 이론(theory of embodied mind)’을 2021년부터 2024년까지 3년간 인문사회분야 일반공동연구 지원사업(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주관)으로 수행하고 있다. 

체화된 마음 이론은 내재주의와 뇌 중심주의에 치중하고 있는 현재의 ‘마음 연구’를 극복하기 위한 인지과학 이론으로, 1990년대 이후로 해외 학계에서는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체화인지연구단에서는 철학, 문학, 미학, 인지과학, 법학, 영화학, 의학 등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모여 융복합적으로 체화된 마음을 연구한다. 

이번 특별기획에는 20명의 교수·연구자가 참여한다. 연재 주제별로 체화인지연구단 연구자와 관련 외부 전문 연구자의 대담 형식으로 풀어내 자유롭고 생생한 담론을 제시할 예정이다.

‘체화된 마음 연구’ 여덟 번째 연재에서는 ‘체화된 인지와 예술’을 주제로 정혜윤 명지대 교수(예술학부 아트앤멀티미디어전공)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미학)가 대담을 나눴다. 

△ 예술에 대해서 굳이 체화를 논할 필요가 있을까요? 철학이나 과학이 탈신체적이라면 예술은 논리보다는 직관, 이성보다는 감성, 사고나 계산보다는 몸에 호소하는 것이 아닌지요. 예술에 대해 몸의 관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정혜윤(이하 정) : 언뜻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예술이 늘 몸의 관점에서 주목되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지요.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술은 ‘감성’과 ‘이성’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어요.

사실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시와 음악, 그리고 회화, 조각, 건축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전혀 별개의 활동으로 생각되었는데요. 시와 음악은 ‘엔토우시아스모스’, 즉 영감에 의한 비합리적인 활동으로, 회화, 조각, 건축은 기술(techne)에 의한 합리적인 제작 활동으로 여겨졌답니다. ‘감성’과 ‘이성’이라는, 예술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이미 이때부터 있었던 것이지요.

18세기 후반 이래 이런 활동들이 비로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후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술에 대한 서구의 이해는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감성’과 ‘이성’의 두 축을 오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성 중심주의적인 서구의 전통철학에서 예술은 주로 감성과 행동, 육체적 욕망과 쾌락에 관련된 것으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 19세기 중반 이래 예술에 대한 서구 담론의 상당 부분은 예술의 본질을 감성보다는 인식에서 찾고 있어요. 한슬릭이나 그린버그로 대표되는, 음악과 미술에서의 형식주의가 대표적입니다. 한슬릭은 음악을 들으면서 깊은 감정에 빠져드는 ‘감정과다주의’(Empfindsamkeit)적 청취를 ‘병적인’ 청취로 보고 강하게 거부했지요.

이러한 이성 중심적 관점은 현대 영미미학의 담론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데요. 진정한 음악적 경험에 사사로운 신체적 느낌은 관여하지 않고 오직 인식적인 판단만이 개입된다는 키비의 주장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경험과 이해에서 몸이 담당하는 역할에 정당한 자리를 돌려주는 것은 결코 새삼스런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공들여 해야만 하는 일이지요. 

심광현(이하 심) : 과학은 탈신체적-이성적이고 예술은 신체적-감성적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이 기초하고 있는 이분법 자체가 타당한지를 새롭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 이분법의 배경에는 창조주 신-초자연적인 이성과 피조물 자연-감성적인 신체의 이분법, 신으로부터 이성을 가장 많이 배분받은 인간에 의한 피조물 자연의 지배라는 서구의 오래된 신학적-수직적 존재론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인류세’라고 부르는 지질학적 위기도 감성적 자연에 대한 이성적 인간의 무제약적 지배라는 오래된 존재론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신체화된 마음’, ‘이성적 감정’, ‘인간의 자연(human nature)과 비인간의 자연(non-human nature)의 공진화’라는 수평적-일원적 존재론으로의 전환이 시급합니다. 

△서구의 전통철학 속에서 예술이 주로 감성에 관련된 것으로 여겨졌다면 체화이론을 도입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그러한 전통을 되살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 :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예술이 감성의 조명 아래 놓인 것으로 이해될 때 예술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술의 감성적 힘은 이성의 고양에 보탬이 될 경우에만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어요.

일례로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어떤 종류의 리듬, 선법, 악기들이 조화된 영혼의 육성에 도움이 되는지를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데요. 플라톤은 유약함이나 흥분을 유발하는 음악은 배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술은 오직 이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때라야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의 생각은 심 교수님의 말씀처럼 이성과 감성, 마음과 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물론입니다. 감성적인 음악에 추방을 선포한 것은 몸에 대한 억압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요. 체화인지의 관점을 예술에 도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심 : 신체화된 마음이라는 일원론의 관점에서 보면 감성·예술과 오성·과학과 이성·철학은  고정된 경계에 갇히는 대신 벽을 허물고 자유롭게 크로스오버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체화된 마음의 과학’의 태동을 주도했던 프란시스코 바렐라에 의하면 과학적 탐구의 기본 요소인 공간과 시간도 몸에 앞서 주어지는 조건이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인 몸의 세포들의 연합 방식에 따라 ‘조각’되고 ‘구성’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는 ‘현재’ 시간도 탈신체화된 물리적 시계나 지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몸에 내장된 일종의 생체 시계의 생리학적 필요에 의해 0.3초의 지속을 갖습니다.

또 신경과학자 제럴드 에덜먼이나 로돌포 이나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환경과 몸의 상호작용을 매개하고 조율하는 것이기에 몸과 분리되는 즉시 존속 불가능합니다. 또 인지과학과 인지언어학에 기반을 두어 철학의 재구성을 시도해온 레이코프와 존슨의 ‘몸의 철학’에 의하면 일상 언어는 물론 형이상학적 언어와 개념들 모두가 살아있는 몸의 기본층위 운동, 가령 걷기, 쥐기, 달리기, 앉기, 상하좌우 둘러보기 등에 의해 구성된 ‘은유’입니다. 

이런 다양한 관점들은 과학기술의 거대한 발전과 철학의 복잡한 논리들 모두가 애초에 환경 속에서 움직이는 몸의 근육과 신경체계들의 다양한 기능들을 보완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은유적인 개념들의 복합체로 진화해 온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송이 말했던 것처럼 몸은 환경과 내부를 넘나드는 에너지와 물질의 신진대사의 복잡한 흐름을 조절하는 ‘비결정론적 중심’인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예술은 모든 것을 필터링하고 선택하고 외부와 소통하는 몸의 운동의 가장 오래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체화인지의 관점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요.
정 : 심 교수님의 말씀처럼 체화인지의 관점에서는 이성과 감성, 마음과 몸을 나누는 이분법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에 몸이 마음에 비해, 감성이 이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생각 역시 불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감성으로서의 예술은 더 이상 이성에 봉사할 필요도, 경계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예술에 대한 왜곡 없는 이해가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톤이 예술을 추방할 것을 주장한 것은 아마도 그가 예술이 지닌 감성적 위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텐데요. 체화인지의 관점에서 그러한 힘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수용될 대상이지요. 

체화인지의 관점을 예술에 본격적으로 도입할 때 관건은 예술적인 몸이 ‘어떤’ 몸이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술에 관련된 몸은 대체로 ‘수동적인’ 몸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외부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몸’ 이상의 몸은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 뒤에는 예술작품을 고정된 자극으로 보는 시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감상자의 몸은 지각적 정보를 처리하는 매개체이고요. 예술작품의 의미는 두뇌의 해석 작업의 결과로 여겨집니다. 몸을 지각적 정보와 해석 사이에 낀 매개체로 여기는 고전적 인지주의의 관점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지요. 헐리가 ‘샌드위치 모델’이라고 비판한 이 도식이 체화이론에서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습니다.

체화인지의 관점에서 몸은 언제나 환경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몸, 환경과 결속되는 몸, 환경을 창출하고 의미를 생성하는 몸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술작품이라는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상자의 몸은 그저 반응만 하지 않습니다. 탐색하고 찾아내고 개척하고 생성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작품은 오직 감상자의 몸을 통해서만 그 정체성이 확정되지요. 그 의미도 결정되고요. 

심 : ‘신체화된 마음’의 관점을 문자화된 역사적 기록과 철학과 과학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 수만 년 전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와 연결시켜 보면, 인류 계통발생의 진화 과정은 ‘환경과 몸의 상호작용으로 조절로서의 뇌의 진화 → 직립에 의한 몸과 손과 입술의 자유도의 증대 → 예술적 표현 → 문자의 탄생과 역사 시대의 시작 → 철학의 등장 → 과학적 분화…’와 같이 몸에 적합한 환경이 동심원처럼 확장되어온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이분법과 연관된 수많은 문제들은 수평적인 이 동심원의 수축과 팽창을 수직적인 상하 운동으로 오역, 변질시킴으로써 발생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역을 다시 바로 잡으면 예술은 플라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그 출발점이자 매번 회귀해야 할 몸의 중심성과 더불어 동심원을 그려온 인간 문명의 환원 불가능한 중심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선사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반론은 ‘시간의 화살’이라는 은유에 고착된 것입니다. 우리 몸과 미디어와 환경의 관계를 동심원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관계가 보입니다. 물리적 시간과 달리 생명의 시간은 피드포워드와 피드백의 부단한 교대를 통해 신진대사를 유지하는 몸의 운동에 의해 순환하며 확산과 수축, 연속과 불연속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동적 과정입니다.

따라서 ‘환경과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몸 → 예술 → 철학 → 과학 → 철학 → 예술 → 몸 → 환경 → 과학 → 철학…’이라는 동심원의 확산과 수축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 최근 예술에 관한 신생학문으로서 신경미학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체화인지의 관점에서 신경미학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정 : 신경미학은 인간의 미적 경험, 특히 예술작품에 대한 지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경생물학적 기반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인데요. 그런 만큼 신경미학이야말로 예술을 진정으로 몸의 관점에서 해명해 준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볼 때,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을 때 뇌신경계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니까요.

그런데 신경미학이 보여주는 몸이란 과연 ‘어떤’ 몸일까요? 아직까지 신경미학의 몸은 ‘반응하고 지각하는’ 수동적 몸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체화인지에서 강조하는 ‘행위하는’ 몸, ‘감각기관 이상’의 몸, ‘상황과 하나’인 몸은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신경미학의 이러한 한계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에 대한 과학적 접근에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몸에 대한 무시는 19세기말 페히너가 사변적 미학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경험미학을 제시했을 때부터 이미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경미학이 예술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규명해 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데요. 이런 기대는 몸의 능동성을 강조하고 몸과 마음, 환경의 분리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체화인지의 관점 없이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심 : 신경과학의 발전된 성과를 기존 학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최근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경윤리학’이지요. 아직 초기 단계지만 ‘신경미학’ 역시 인공지능 기반 가상현실-메타버스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미국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이런 연구들은 대부분 2세대 인지과학인 ‘연결주의’ 모델에 기반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중대한 문제들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수천억 개 신피질의 뉴런 연결망의 ‘역설계’를 통해 뇌의 패턴 인식의 구조와 기제를 파악하고 이를 알고리즘화 하고 컴퓨테이션 하는 방식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몸의 더 복잡한 운동과 직결되어 있는 구피질(변연계와 뇌간-시상하부)의 작동 방식을 간과합니다. 

뇌가 몸의 유기적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몸으로부터 추상한 뇌의 연결망만을 모델링하는 이런 방식의 극단적 형태가 영화 「매트릭스」에서 그려진 적이 있지요. 몸은 생체 배터리로 사용되고 뇌는 거대한 인공지능-가상현실 시스템과 연결되어 유토피아를 향유하는 방식으로 몸과 뇌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존재 방식이 그것이지요.

몸을 배제한 뇌과학-인지과학-거대자본-GNR 기술의 네트워크에 내재한 이런 위험성을 예방하려면 환경과 몸과 예술의 분리 불가능한 결합을 출발로 삼아 피드포워드하고 피드백하는, ‘신체화된 신경미학’, ‘신체화된 신경윤리학’이라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미학)

서울대 미학과 석사 및 박사과정 수료.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명예교수로 출강 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화연구, 미학, 영화이론과 미술이론이며, 최근 자연적-사회적 환경 변화와 인간 활동 변화의 상호작용을 뇌과학과 체화된 마음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역사지리-인지생태학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 등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 「지각과 마음의 생태학과 운동-이미지와 내러티브의 영화적 순환」,  「뇌의 안정성과 가소성의 변증법」 등이 있다.

정혜윤 명지대 교수(예술학부)

서울대에서 미학으로 석사학위를, 미국 미시건대(앤아버)에서 음악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분석미학으로부터 출발해 인지언어학과 신경미학으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해 왔으며 최근에는 체화된 인지의 관점에서 미와 예술현상을 분석하고 인간 감성의 본성을 해명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음악 비평 해석 분석』, 『미학이 재현을 논하다』가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마음의 음악적 확장」,  「음악의 정서표현성에 대한 현대분석철학의 논의와 그 한계」, 「음악의 생명성: 발제주의에 의한 해명」, 「신경미학, 무엇이 문제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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