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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36] 갑질을 끊으려면
[한민의 문화등반 36] 갑질을 끊으려면
  • 한민
  • 승인 2022.05.17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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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36

 

한민 문화심리학자

갑질의 고리를 끊는 것은 갑이 해야 할 일이다. 을들이 아무리 신고를 하고 문제를 삼아도 또 다른 갑질에는 대책이 없다. 갑질의 근거는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다. 갑질에는 나의 지위가, 나의 재력이, 나의 나이가 우월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어떤 요구든 해도 된다는 가정이 깔려있다. 상대방은 그런 요구를 군말없이 받아들여야 하며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 양상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며 체화된 권위주의적 행위양식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한국인들의 행동에서 근본적인 기준은 역시 가족이다. 효를 으뜸으로 여겼던 나라에서, 군사부일체라 하여 아버지의 권위를 임금에 견주었던 나라에서 가장의 말씀은 곧 법이고, 가장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한국사회의 특징은 이러한 가부장적 질서가 가정 내의 역할 관계에서만 머물지 않고, 사회의 전반으로 확대, 재생산된다는 데 있다. 한국사회는 하나의 큰 가족이며 한국 사람들은 가족관계에 기반한 관계를 맺는다. 이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부르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삼촌, 이모…. 한국인들은 타인을 지칭할 때 쓰는 호칭은 대부분 가족관계에서 유래된 친족호칭이다. 

한국인들은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도 가족이 되는 방식을 사용한다. 우선 서로의 연배를 확인한 후 사적으로 조금 친해지고 나면 서로를 형/아우(나이 차이가 크지 않을 때), 삼촌(이모)/조카(나이 차이가 한 세대 정도), 할아버지(할머니)/손자손녀(나이 차이가 두 세대)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도 진짜 아버지에서 연장자, 사장, 상사, 지도교수 등 아버지뻘의 인물들로 확대된다(물론 현대사회에서는 남자들만 가장의 권위를 갖는 건 아니다). 이는 한국인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는 사회의 형태를 게마인샤프트(Gemeinshaft)와 게젤샤프트(Gesellshaft)로 분류하고 있다. ‘공동사회’라는 뜻의 게먀인샤프트는 혈연과 정(情) 등의 정서적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가족, 촌락 등의 집단을 의미하며, ‘이익사회’로 옮길 수 있는 게젤샤프트는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맺어진 회사, 정당 등을 뜻한다. 

가족과 회사가 다른 것처럼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의 인간관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게마인샤프트 내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훨씬 많이 이해하고 또 상호 의존한다. 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게젤샤프트 내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얻게 되는 이익에 상응하는 행동만을 취한다. 이것이 계약적 관계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오랜 시간 게마인샤프트적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살아왔다. 한국인들이 살았던 공동체는 한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친족들로 구성돼 있는 소위 집성촌(集姓村)이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길을 걷다가, 논밭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타인을 ‘가족’으로 인식해 왔다는 것이다. 더 이상 농사도 짓지 않고 집성촌을 이루어 살지 않는 지금도 이러한 타인 인식은 이어지고 있다. 가족 내의 관계를 계약을 통한 공적 관계에서까지 기대하는 것이다. 갑질은 이러한 관계에서 당연시된다. 

또한 가부장제에서 가장의 권위가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가장의 부양책임이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가장의 가장 큰 책임이자 가장이 누리는 모든 권리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가장의 권위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내가 ‘아버지’로서 ‘자식들’에 대해 일종의 ‘부양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 즉 ‘네가 존재하는 것은 나 때문이다’는 생각이 갑질의 근원이 아닐까. 

사실 나이나 지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돈을 벌어오기 때문에, 일자리를 주었기 때문에, 커리어를 열어주기 때문에…. 그 혜택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갑질의 근원인 것이다. 

따라서 갑질을 근절하기 위해서 갑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을들은 내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부모 자식에 대한 생각에 있다. 내가 벌어 먹인다고 자식이 항상 내 말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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