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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厚黑)의 시대, 덕을 묻다
후흑(厚黑)의 시대, 덕을 묻다
  • 최재목
  • 승인 2022.05.16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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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최재목 논설위원 /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논설위원

정치는 권력투쟁에 가려 ‘사람’이 안중에 없다. 일찍이 함석헌은 “세상 정치가 곡식 고갱이 뽑는 짓 아닌 것이 없지”라고 비꼰 적 있다. 옛날 중국 송나라 사람이 일을 잘한다고 벼의 고갱이를 쏙쏙 뽑아놓아 결국 다 말라버리게 된 이야기 즉 『맹자』 ‘송인알묘(宋人揠苗)’ 대목에 붙인 말이다. 자신들은 ‘참 열심히 했다’며 자랑할지 모르나 세상을 다 망쳐놓은 덜떨어진 정치인들에게 적절한 충고이다.

함석헌은 『맹자』의 다른 곳에서 “천하에 정치한다는 것들, 제(齊) 나라 놈 같이 제 처, 제 첩들이 몰래 울지 않을 것들 없지!”라며 측은한 이야기를 보탰다. 식구들에게 정치하러 다닌다며 건방떨 때 어딘지 수상쩍어 미행을 해보니 전부 거짓이었다는 이야기에 말이다. 그간 대한민국의 정치는 후안무치, 즉 후흑(厚黑). 두꺼운 낯(厚顔)과 시커먼 마음(黑心)의 시간이었다. 

정치는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두 가짜’인가. 한때 나는 『논어』 그리고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의 ‘덕치’ 같은 이상주의에 경도돼 있기도 했다. 그래서 죄르지 루카치의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말을 믿었다.

하늘에 빛나는 저 별과 양심의 조응. 천지와 인간의 덕성이 일치하던 시대. 덕 있는 인간이 있고, 그런 분을 찾아 덕담을 듣고, 그를 큰 바위 얼굴 삼아 닮고자 했던 시대는 ‘인간’이 길의 좌표였다.

요즘의 정치를 보면 정말 『순자』의 성악설에 더 끌리게 된다. 나아가 『한비자』의 ‘법치’에 더 철저하길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도덕도 법도 허상이다. 힘(권력)과 권모술수로 밀어붙이는 ‘후흑의 정치’가 전부이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에선 배울 것이 없다. 

이런 정치 환경에서 교육은 불안하다. ‘가야할 길의 좌표’를 지워버린다. 영국의 화가 터너가 그린 ‘노예선’과 ‘눈보라’에서 만나는 파탄 직전의 혼돈스러움, 음산함만이 감돈다. 이에 도사리고 있는 파국의 균열과 주름. 이런 것을 ‘카타스트로피’라 한다. 아주 적은 변화가 돌연 엄청난 질적 변동을 가져오는 경우이다. 법과 후흑에 골몰하며 ‘덕(德)’ 문제를 상실한 우리 사회 전반에 카타스트로피 포인트가 있다.

이성의 힘과 진보를 믿는 오만한 계몽주의적 역사관이나 그런 사상적 시선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식의 연속을 보려하나 거기엔 분명 사각지대가 있다. “역사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고 불연속적이며, 카타스트로피로 가득 차 있다”고 발터 벤야민이 말하듯, 지금 우리 정치는 도처 불연속점, 카타스트로피 포인트를 숨기고 있다. 섬세한 눈으로 직시한다면 ‘과거에서 미래로’ 통하는, 벤야민이 말한 ‘근원의 역사’를 만날 수 있으리라. 과거에서 이어지는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계몽주의적 역사관이 발견할 수 없었던 역사 말이다.

연속성을 일탈한 비약적-혁명적인 ‘지금 이 때’(jetztzeit)를 잡을 수 있는 눈은 균열-주름 밑에 가라앉은, 놓치고 있는 정보의 독해로 향할 것이다. 예컨대 명명덕(明明德)과 신독(愼獨) 같이 ‘낡은(과거의)…미래로 향한’ 대목, 인간이 자율적으로 지켜내야 할 ‘인간 됨/다움’의 가치 말이다. 

후흑의 와중에 법 문제로 난리법석이나, 과연 규범만으로 족할까. 다시 ‘덕’을 묻는 인문정신에서 시작해야 한다. 후흑의 정치는 법으로 완전무장하려 드나, 이럴 때일수록 교육은 ‘인간’을 좌표로 삼고 나아가야 한다.

최재목 논설위원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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