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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잡지 ‘개벽’의 이미지와 식민의 기억
[디자인 파노라마] 잡지 ‘개벽’의 이미지와 식민의 기억
  • 조현신
  • 승인 2022.05.20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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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⑱_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디자인학과 교수
1920년 6월 발간한 『개벽』 창간호 표지
출처=아단문고

잡지 『개벽』은 1920년대 초중반에 조선의 사상과 의식, 문화, 생활양식까지 선도했던 잡지로 6년 2개월 동안 통권 72호를 발행하였다. 1920년 6월 25일 창간되어 37회 이상의 압수와 발매금지, 정간 1회, 벌금 1회, 기사 삭제 95회의 탄압을 받다가 결국 폐간당했다. 매호 7천 부에서 8천 부를 발간하였고 “청년들 치고 외출할 때면 으레 단장 들듯이 『개벽』을 옆에 끼고 다니었다”하며, 『개벽』을 끼고 다니는 남자를 거리에서 훔쳐보는 여성들의 만화컷이 나올 정도였다. 사상과 계몽 위주의 당대 주요 잡지들이 10회를 못 넘기고 사라진 현실에서 『개벽』은 내용의 다양성, 높은 원고료와 탄탄한 재정, 천도교 분소를 중심으로 한 마케팅까지 뛰어나 식민지 기간 가장 영향력이 큰 잡지로 평가된다. 또한 다채로운 시각적 편집도 거론되는데, 실제 개벽사에는 현재의 개념으로 전문 디자인 팀인 도안실이 따로 운영되면서 기업에게 광고 도안을 맡기라고 홍보하고는 했다.

 

결기에 찬 표지와 검열의 역설코드

이런 잡지를 내용 중심이 아닌 시각 이미지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도 새로운 해석을 낳게 한다. 1910년대 47종이었던 잡지는 1920년대 170종으로 늘었지만 컬러 표지는 드물었다. 1917년 이광수의 『무정』을 시작으로 본격 문단 소설들이 발표되었고, 이들 문학서나 동인지의 표지는 대부분 당대 딱지본의 울긋불긋하고 화려한 표지 등과는 대비되는 수묵의 느낌을 주는 단색조였다. 인쇄비나 디자인의 문제점 등도 있었겠지만 색에 대한 지식인들의 수용 태도가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 민화나 풍속도는 화려했으나 선비들의 수묵화는 단색조에 고작해야 ‘청록 산수’라 해서 약간의 색이 가미된 것, 또한 무속이나 사찰의 색은 그리도 화려했지만. 선비들의 터인 서원은 어떤 색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해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벽』은 지식, 사상과 문화의 대중성을 지향하면서 창간호부터 화려한 다색 컬러로 표지를 출간했다. 하지만 색의 시각적 자극과는 별도로 이미지는 강건한 상징적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창간호는 조선맹호도의 맥을 이으면서 최남선이 민족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호랑이가 지구 위에서 포효하는 형상이다. 이어서 제4호 니체의 초인 사상을 상징하는 매, 제7호의 무궁화인 듯한 꽃송이 나뭇가지에 꼬리를 길게 늘인 흰 닭, 샛별을 향해 나가는 장수 이미지 등을 사용하여 민족적 결기,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의 자아상을 표출했다.

검열당한 『개벽』 일부. 사진=조현신(위쪽, 국민대 성곡도서관 소장), 국립중앙도서관(아래쪽)

이러한 표지의 정치적, 사상적 표상은 본문의 흐름을 강제로 끊어낸 검열의 흔적들과 호응한다. 군데군데 빈 백지, 혹은 새까맣게 덧칠되거나 붉은 펜으로 뒤덮인 흔적들은 『개벽』 편집진과 일본 식민 당국과의 협상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식민지식인의 불령불온(不逞不穩)을 걷어낸 백지와 복자(伏字) ‘XXXXXXX, ○○○○○○○, ’는 오히려 당대 지식인들의 의분에 찬 정체성을 보여주기에 동시에 독자들과의 연합을 강화하는 역설적 코드이기도 하다.

 

1921년 11월 발간한 『개벽』 제17호 표지
출처=근대서지

서정적 표지의 양가성

이런 초기의 표지 이미지는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서정적인 일군의 표지로 대체되었다. 1년여가 지난 후 발간된 14호(1921년 8월)를 시작으로 여섯 권의 표지에서는 바다 위에 피어나는 뭉게구름, 붉은 꽃나무, 황금벌판에 기러기가 날고, 달 밝은 공산에 홀로서 있는 사슴 등 서정의 기표들이 전개된다. 서정성은 자연이 부여하는 중립의 성정, 무심의 미덕에 기인하며, 오로지 눈앞의 환경에 판단 없이 몰두할 때 환기된다. 그렇기에 흰 뭉게구름과 붉은 꽃이 어우러진 그 바다는 제 4호의 독수리가 날카롭게 바라보는 모던 신지식을 품은 그 바다가 이미 아니다. 달이 뜬 공산에 홀로 서 있는 사슴, 배를 타면서 한가로이 책을 읽는 남성은 완상적 주체의 상징으로, 초기 표지에서의 강한 기상으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신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대조되는 이미지군들은 정간과 압수의 팽팽한 저항 중에도 풍경에의 향유를 담아낸 것으로, (어떤 해석을 하건) 억압의 현실을 살아간 지식인의 양면적 심상을 보여주는 기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면적 심성은 또 하나의 코드인 광고를 통해 정치나 사상적 주체와는 또 다른 욕망의 정체성으로 연결된다.

 

소유로 달성되는 신인간

근대기 매체에 본격 등장하는 광고는 그 자체가 모던의 몸체를 보여주는 새로운 문화물이었다. 게재 여부가 운영자금을 위한 당연한 고육책이라 할지라도, 그 점거성으로 독자들에게는 피해 가기 힘든 유혹이었다. 대부분 남성이라고 추정되는 8천여 명의 독자를 거느린 『개벽』에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광고가 많다. 빈번하게 실린 광고는 양복, 신발, 안경, 만년필, 모자, 자동차, 이발 기구 등이었고, 여성의 캐리커처로 맥주, 술 광고 등이 간간이 지면의 앞부분에 실렸다. 지면의 배치와 크기는 곧 권력이다. 거의 한 페이지에서 세 페이지까지 전개되는 신문물의 광고는 남루한 현재의 결핍을 보여주면서 신기한 세계를 소개하는 욕망의 전시장으로 등장했고, 이는 자연스레 독자를 자기 검열이라는 근대적 인간의 숙명으로 이끈다.

『개벽』(국민대 성곡도서관 소장)에 실린 청년양화점(왼쪽), 해인양복점(오른쪽) 광고. 사진=조현신

한 예를 보자. 제16호 청년양화점의 광고는 다양한 신발 이미지와 함께 양복으로 잘 차려입은 인물을 등장시키고, “경쾌한 양화를 착용하고 추색을 상(賞)하면 실로 심신이 상쾌하도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새 신발에 대한 감각적 언설로 물질적 소유를 통해 서정의 충족을 약속하는 광고가 드디어 시작되는 것이다. 제18호 ‘해인옥 양복점’의 복장은 광고 밖의 당대 첨단 유행인 ‘데카당 패션’을 갖춰 입고 동인지 활동을 활발히 하던 김동인, 김찬영의 사진에서 그대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근대성을 상징하는 구두, 모자, 안경에서 주택에 이르기까지 『개벽』 전편의 광고는 모던 라이프의 안내자였다.

식민 강점기 최고의 잡지인 『개벽』은 표지를 비롯해 논설과 각종 기사로 근대적 평등이념과 민족적 각성을 호소하는 지식인의 잡지였다 하지만 이 매체는 동시에 상품의 장착만으로 누릴 수 있는 차별적 주체, 감각적 존재 방식을 가르쳐주는 메시지를 품고 등장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근대적 정체성을 시작한 식민국가의 양가적 기억이 도덕과 자본을 둘러싸고 위정자, 지식인들을 바라보는 현재의 잣대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디자인학과 교수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디자인물에 관심이 많다. 특히 한국의 근대기 시각디자인문화사를 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대표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문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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