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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공동체(EAC)'의 다이나미즘
해외동향: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공동체(EAC)'의 다이나미즘
  • 라경수 일본통신원
  • 승인 2005.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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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多孔化 주장…'동아시아공동체대학' 논의도

바야흐로 '동아시아' 시대다. 유럽연합처럼 지금 아시아에서도 지역통합으로 가려는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동아시아공동체의 다이나미즘(Dynamism of the East Asian Community)’을 테마로 한 흥미있는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지난 12월 2일~4일까지 일본 와세다대에서 열렸다. 

"현대 아시아학 창생"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는 이 대학 21세기 COE-CAS(Center of Excellence - Contemporary Asian Studies)가 주최한 이번 심포지엄에서 '동아시아공동체'를 둘러싸고 어떠한 담론들이 제기됐는지 살펴보자.  

먼저, 금번 행사에서 단연 돋보였던 것은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수상이 자리를 빛냈던 점이다. 주최측은 마하티르를 초청해 명예박사학위까지 수여하는 정성을 보였으며, 이에 마하티르는 ‘Japan: The Key to East Asian Unity’라는 명연설로 답례했다. 마하티르라고 하면 이미 15년 전인 1990년부터 한국, 일본, 중국, 그리고 아세안 6개국이 주축이 되는 '동아시아경제권구상'(EAEG)과 '동아시아경제협의체'(EAEC)를 역설했던 "아시아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당시의 '말레이시아발 지역공동체' 구상은 이해 당사자에서 제외된 미국과 호주 등이 강하게 반발해 실천되진 못했으나 현재 급부상중인 EAC 구상의 밑거름이 된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왜 마하티르가 한사코 '와세다행'을 받아들였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리라. 당일 회의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빼곡했으며, 동아시아가 지금 필요로 하는 리더상을 마하티르를 통해서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일간 총 5개의 세션으로 열린 심포지엄에선 EAC를 둘러싼 제반 문제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있게 논의됐다. 그 중에서도 와세다 COE-CAS의 대표인 모오리 카즈코(毛里 和子) 교수는 ‘新중일관계와 동아시아공동체’라는 논문을 통해, 정상회담이 수년째 열리지 않을 정도로 악화일로에 있는 중일관계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EAC 실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했다. 또한, 역으로 EAC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域內 핵심 파워인 중국과 일본의 대립관계가 조속히 타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모오리 교수는,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양국간 혹은 다자간의 '공동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말썽이 되고 있는 역사인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안목으로 '한중일역사문제검토공동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우선 실천 가능한 '조그마한' 공동 프로젝트들을 개별적으로 제도화 및 기능화 시키는 것이 EAC에로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한편, 같은 COE-CAS의 부대표인 히라노 겐이치로(平野 健一郞) 교수는 ‘국제이동과 내셔날리즘/리저널리즘’이란 논문을 통해, 기존의 정치경제적 레벨이 아닌 ‘사람의 이동’이란 키워드로 EAC를 조망코자 했다. 히라노 교수는 인공위성이 찍은 '밤의 지구' 사진을 제시하면서 어둠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지역은 '사람의 이동'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음을, 그리고 위성상으로는 국경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게다가 이러한 밤의 지구 사진은 역내 항공로 네트워크의 조밀도와 거의 일치함을 증명해 보이면서, 다소 추상적인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히라노 교수는 국경 자체가 완전히 '보더리스(borderless)'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제하면서도, 사람과 더불어 정보, 물자, 자본이 국경을 쉽게 越境함으로 인해 국경에 무수히 많은 '구멍'이 뚫리는 이른바 "국경의 多孔化(porous borders)" 현상이 지금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이 현상은 사람의 이동(월경)을 더욱 증대시키며, 반대로 사람의 이동이 국경을 더욱 다공화시킨다는 상호보완적인 맥락으로 현재와 미래의 동아시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색다른 주장을 해 주목을 끌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때마침 지난 14일에 '동아시아정상회의'(EAS)가 처음으로, 그것도 마하티르의 나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것은 향후 EAC 구상에 청신호가 아닐 수 없다. 아세안 10개국, 한국, 일본, 중국,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이 참여하는 EAS는 EAC 실현을 위한 역내 협의체로써 정례화될 전망이다.

하지만, 갓출항한 배가 자칫하다간 산으로 가게 생겼다. 회원국 확대문제를 놓고, 호주와 인도를 포함시키려는 일본과 적어도 인도는 배제해야 한다는 중국 등이 이미 주거니 받거니 하며 삐걱거리는 양상이다. 이러한 자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국가적 정치적 접근은 그 태생적 한계가 있다. 오히려 민간 차원의 다양한 접근을 통해, EAC가 실질적 주체여야 할 "사람들을 위한 열린 커뮤니티"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금번 와세다 심포지엄은 작지만 내실있는 알짜배기 민간 행사라 하겠다.

이번 행사에는 일본 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몽골, 중국, 타이완,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그리고 한국 등 동아시아 각 지역 전문가들이 20여명이나 참가했다. 자기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EAC 실현에 필수불가결한 가칭 '동아시아공동체대학' 설립을 위한 대학간 혹은 연구자간 네트워크 구축을 와세다가 주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투자'해야 하지 않겠냐고, 주체측은 귀띔한다.

과연 어디까지를 동아시아 범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이렇게도 각국이 민족주의가 강하고 문화가 다양한데, 과연 동아시아적 가치라는 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회의적 시각도 만만치 않은 가운데, 역내에는 정치, 경제, 역사, 영토, 환경, 안전보장 등 산적한 현안 문제들이 녹록치만은 않다. 한 마디로 EAC는 "산 너머 산"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공동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인식하에, 어떻게 하면 이를 구체화시킬 있으며, 어떠한 '아시아성'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 4년간이나 착실히 고민해 온 와세다의 노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도 배울 점이 많지 않을까.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박사과정 / 라경수(rhas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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