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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북한사 연구 이유를 자문한다…아직은 오리무중
지금도 북한사 연구 이유를 자문한다…아직은 오리무중
  • 우동현
  • 승인 2022.05.11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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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⑨ 간학제적 접근을 통한 북한사 연구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현재 북한사 연구(자)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우회로는 
해외 문서고 자료에 대한 추가적 발굴과 비판적 검토일 것이다. 
북한 ‘핵물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과학자 도상록의 저역서를 처음 찾았을 때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북한사 서사의 수요는 어디에 있을까?

최근 엄청난 대(對) 러시아 제재로 현지에서 연구를 진행하던 필자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한국 계좌의 현금을 인출할 길이 막혔고, 스타벅스·맥도날드 등 미국·유럽 브랜드는 현지 영업을 멈췄다. 귀국용 항공편도 부쩍 줄었다. 제재에 따른 연료·원자재 가격 상승은 세계경제를 흔든다. 어느 언론사도 이번 사태의 역사적 배경을 균형 잡힌 논조로 설명해주진 않는다. 고조되는 국제적 갈등의 한가운데서, 불안정한 처지의 역사학 전공 대학원생인 필자는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그 조건은 무엇인지 다시 궁금해진다.

‘수요 없는 주제’를 공부한다는 것

필자는 과학기술사, 환경사, 의학사 등 간학제적 접근을 통해 북한사, 나아가 사회주의권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관심을 가진 연구자이다. 석사과정 진학 당시 관심 주제는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즉 ‘한강의 기적’이었지만, 북한 전문가이신 정창현 선생님의 특강을 듣고 흥미를 느껴 북한에 파견된 ‘소련계 조선인’(고려인)의 역사로 학위논문을 썼다.

그때만 해도 북한에 대한 세계의 무관심한 태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북한 연구는 미국에서 많은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격려를 종종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사뭇 달랐고, 깨달음은 곧 찾아왔다. 2018년 한 대학원 수업에서 저명한 과학사 전공 미국인 교수가 내게 물었다. “자네는 남한에서 왔는가, 북한에서 왔는가?” 한반도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분의 질문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알고, 가르친 이들은 대부분 기술적 힘(삼성·현대·LG)이나 문화적 힘(한류)을 매개로 한국을 보았다.

반면 그들의 시선에서 북한은 핵미사일을 가진 “이상한 코리아”에 불과했다. 영어권 학계에서 코리아의 위치를 이해한 귀중한 순간이었다. 유럽현대사의 권위자 티모시 스나이더가 북한사를 공부한다는 내 소개를 듣고 해준 말은 “건승하게, 젊은이”뿐이었다.

박사과정 동안, 영어권 학계의 방대한 연구 성과를 공부하는 것만큼 중요한 과제는 다른 이가 내 의견을 받아들이게(buy) 만드는 방법을 갈고닦는 일이었다. 특히 미국 역사학계는 글이 읽히도록(sell) 하는 여러 전략과 장치에 대한 끊임없는 개발과 적용을 문서고 자료의 이용만큼 더 중시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필자가 번역한 MIT의 역사학자 케이트 브라운의 저서들이 좋은 예이다. 러시아의 우랄, 미국의 워싱턴,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을 관통하는 그녀의 저술은 문서고 바깥의 소재들을 대거 활용해 관습적 냉전사를 뛰어넘은 환경사의 고전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북한사 연구에 적용할 수 있을까? 그전에 나는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만든 북한사 서사의 수요는 어디에 있을까?

북한과 사회주의권의 협력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완성한 지금도 나는 북한사 연구의 이유를 자문한다. 하지만 명쾌한 답은 북한사 연구(자)에 대한 수요만큼이나 찾기 어렵다.

북한사 연구의 가치·한계·나아갈 길

러시아국립현대사문서고(RGANI)는
1952년 이후 소련공산당에서
생산한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역사가 조수룡의 노력으로
북한 관련 RGANI 자료가 대거 국내에 입수됐다. 사진=우동현

북한사 연구의 가치는 작지 않다. 우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군사적 위협이자 잠재적 동반자의 역사이다. 지피지기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는가. 또 북한사는 1945년 이후 서방 주도의 세계질서에 저항하는 비서구 사회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역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수십 년간 북한 사회의 특징(당-국가 체제, 국유경제, 집단주의, 개인숭배)이 초래한 역사적 비용과 비효율을 지적했다.

한편 영어권 학계에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지구화, 제3세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등 참신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는 데 비해, 북한사 연구는 아직도 북한 정권의 “악행”전제적 기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로 촉발된 ‘문서고 혁명’은 북한사 연구를 비껴갔다. 일부 연구자는 현지 문서고의 외교 자료를 토대로 북한사를 재구성했다. 아쉽게도, 그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천편일률적이다. 이념적인 시각, 즉 북한은 전체주의적이며 그 안에 ‘사회’는 없고 당에 대한 순응만 있다는 관점은 여전히 모습을 바꿔가며 연구 지평을 짓누른다.

정치사 중심, 일국사(一國史) 중심, 이론 중심의 연구 경향도 문제적이다. 정치(사)를 통해서만 북한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 북한의 역사를 국경 안에만 가두는 시각, 역사적 맥락에 대한 면밀한 재구성보다 성급한 개념화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믿을 만한 자료의 부재는 이러한 문제들을 당분간 지속시킬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사 연구(자)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우회로는 해외 문서고 자료에 대한 추가적 발굴과 비판적 검토일 것이다. 러시아에는 앞서 언급한 외교 자료를 비롯해, 북한과 사회주의권의 교류(경제·문화·과학기술·의학 등) 관련 자료 및 희귀한 공간물 자료가 다수 존재한다. 그중 극히 일부가 1990년대 초반 중앙일보사와 개별 연구자들의 노력을 통해 국내로 입수됐다. 필자도 참여하고 있는 이 흐름을 북한사 연구의 ‘작은 문서고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북한 “핵물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과학자 도상록의 저역서를 처음 찾았을 때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양한 북한·소련 자료를 검토해 쓴 필자의 학위논문은 오늘날 북한식 발전 양식의 기원이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의 “성공”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당시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은 1954년~1958년 북한 공업 생산을 연평균 42%, 1959년에는 53%로 관측했다. 성장 속도를 강조하는 ‘천리마 시대’는 이때를 부르는 공식 명칭이 되었다.

북한식 ‘록색혁명’을 통해 1964년 사상 최대인 420만 톤의 곡물이 생산됐고, 같은 시기 경락의 비밀을 밝혔다는 ‘봉한 학설’은 북한 생의학의 자부심을 높여주었다. ‘북핵 위기’의 진앙인 영변 원자로도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64년 건설됐고, 이듬해부터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영국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은 당시 북한을 둘러보고 “코리아의 기적”이라고 칭했다. 현재 북한 언론은 이 시기의 경험에서 배울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필자가 발굴한 도상록의 저역서 일부. 도상록은 정근, 김현봉, 전평수 등과 함께 1950년대 북한의 1세대 핵물리학계를 이끌었다. 사진=우동현

하지만 이 “성공”은 필자의 학위논문에서 밝혔듯,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의 대북 협력과 유·무상 원조를 철저히 지운 선택적 기억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설명할 때, 국내 노동과 농업에 가해진 착취를 언급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토머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1962)를 발표하기 전에 북한은 ‘청산리 방법’(1960)과 ‘대안의 사업체계’(1961)를 통해 나름의 ‘과학기술혁명의 구조’를 세웠다. 그것이 내재한 악순환(낮은 혁신→품질 저하→북한 상품 수요 부재→외화 부족→저투자→낮은 혁신)은 지극히 낮은 물질적 유인 및 끊임없는 다그침(‘사상혁명’)과 맞물려 계속된다. 북한사 연구가 절실히 요청되는 지점이다.
    
역사에서 배우기 위해…북한사 연구의 각자도생?

인문학 연구의 ‘수요’ 부재는 ‘대학의 위기’와 맞물려 한층 더 강화된다. 북한사처럼 수요 없는 분야를 공부한 나 같은 역사학 전공자에게 앞길은 오리무중이다.

앞서 필자는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그 조건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 답은 북한사 연구(자)의 방향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별 연구자가 알음알음 관련 기관들을 방문해 자료를 찾는, 북한식 ‘자력갱생’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작업 방식은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수요 부재는 북한사 연구(자)의 ‘각자도생’을 제도화·정상화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참신한 역사 서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를 찾거나, 기존의 자료를 새롭게 읽어야 한다. 허나 역사학의 기본인 전·후자 모두 북한사 연구자에게는 물질적 보상이 거의 따르지 않는 고비용 활동이다. 대학원생에 불과한 필자의 마음이 매일같이 무거운 이유이다.

우동현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박사과정
「Leveraging Uneven Cooperation: Socialist Assistance and the Rise of North Korea, 1945-1965」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졸업을 앞두고 있다. 가을부터 캐나다 요크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시작한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북한사 연구자로는 최초로 미국 로스알라모스국립연구소에서 학술 발표를 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재해석한 뮤지컬 「동네」의 자문을 맡았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발행하는 『Historical Journal』에 북한 핵개발 계획의 “평화적” 기원을 밝힌 논문 「The Peaceful Origins of North Korea’s Nuclear Program in the Cold War Period, 1945-1965」(가제)의 게재가 확정됐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냉전기 미국 핵기술의 국제사를 다룬 『저주받은 원자』(가제),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총서 36권 『해방 직후 한반도 북부 공업 상황에 대한 소련 민정청의 조사 보고』(공역) 및 38-39권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소장 북한 인물 자료 Ⅱ·Ⅲ』(공역) 등이 있다. 『매거진 G 4호: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에 기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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