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22:40 (금)
미의 철학, 예술의 바다에서 항해하자
미의 철학, 예술의 바다에서 항해하자
  • 박정훈
  • 승인 2022.05.13 10: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평_『미학 강의 1·2·3』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음 | 이창환 옮김 | 세창출판사 | 1656쪽

미에 대한 판정·감정 능력 대신 예술 자체를 철학화
미의 준거점이 자연에서 예술로 이동한 역사적 귀결

이 번역서의 원전은 근대 철학자 헤겔(1770∼1831)이 베를린 대학에서 네 차례 실시한 미학 강의용 친필 수고 및 수강생 노트를 그의 사후 호토(H. G. Hotho)가 한데 모아 『헤겔 전집』에 수록한, 총 1천500여 쪽 분량의 독본이다. 『미학 강의』의 원자료는 이미 망실된 상태에서 이후에 추가로 발견된 또 다른 노트들과 내용상 차이가 목격된다는 이유로 하여 이 저작의 진본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미학 강의』는 예술 ‘개념’을 동서고금의 무진장한 예술 ‘현상’에서 확증하고자 시도한, 가장 철저하고 광대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 최근 별도로 출간된 ‘헤겔 미학’들에는 오히려 헤겔이 직접 쓴 글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거기에서 곧장 그의 미학적 사유에 내재한 체계와 맥락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미학 강의』가 여전히 헤겔 미학 연구의 중추적 거점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미학 강의』의 첫 장을 펴면 우리는 미학에 대한 헤겔의 정의를 만나게 된다. 헤겔은 선배 미학자들이 모색해왔던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감성적 인식’이니, ‘감성의 원리’이니, 미에 대한 ‘미감적(aesthetic) 판정의 능력’이니, 미와 예술이 자아내는 ‘감정’이니 하는 주제 대신에 예술 자체를 철학적으로 논한다. ‘미학이라 쓰고 예술철학이라 읽는다’는 이런 관점은 어찌 보면 이른바 ‘순수 예술’의 체계가 성립하기 시작한 지 한 세기를 조금 넘긴 즈음, 게다가 낭만주의 사조의 발흥과 발맞춰 미의 준거점이 자연에서 예술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귀결일 것이다.
  

절대자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감성으로 포착

이 대목에서 적지 않은 ‘현대’의 독자는 ‘예술 권리의 철학적 박탈’(아서 단토, 1924∼2013) 같은 것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헤겔의 예술 사유에 이런 혐의가 있지 않은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물론 유효하다. 다만, 헤겔이 당대에 주종을 이루던 예술론 및 철학적 사유 방식을 논박하면서 예술의 본령을 철학적으로 엄정하게 정립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철학은 인간이 예술적 산물에서 자기 자신을, 더 자세히는 인간의 자연적·개인적·지역적·관습적·민족적 유한성이 극복된 최상의 진리를 대면한다는 점을 밝힌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자’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 자체의 ‘존재’라기보다는 그런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감성적으로, 관념(“표상”)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포착하고 현시한, 인류의 보편적 관심사다. 그 가운데 예술은 감성적 형식의 절대정신이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신상(神像)은 그리스적 뮈토스 이해를 감성적으로 포착하여 현시한 절대정신이며, 우리에게는 그리스 정신을 해독할 수 있게 해주는 문화적 텍스트다. 

교육과 연구를 위해 『미학 강의』의 원전은 물론 반세기 전에 나온 영역본과 사반세기 전에 나온 최초의 우리말 번역본까지 함께 검토해 온 입장에서, 이번 번역본의 가장 큰 특징으로 단연 질박한 문체를 들고 싶다. 이러한 특색은 비단 역자의 표현 방식에서만 비롯한 게 아니다. 강의를 통해 전달된 말이 글로 다소 거칠게 정착됨으로써 빚어진, 『미학 강의』 특유의 문체를 충심으로 옮기고자 역자가 고투한 성취이기도 하다. 이 지면을 빌려 이 책이 완간되기 직전에 안타깝게 작고하신 이창환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고인의 뜻을 펼치는 일은 이제 온전히 후학의 몫이 되고 말았다.

『미학 강의』에서 무엇을 읽고자 하는가? 고대의 시심(詩心)과 근대적 성찰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보편적 세계상태’(1권, 245쪽 이하)를, 서구 유럽인의 세계관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낭만적인 것 일반에 대해서’(2권, 137쪽 이하)를, 그리고 음악적 소리의 표현적 가치와 음을 통해 소통되는 의미 내용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독자적 음악’과 ‘수반적 음악’(3권, 195쪽 이하)을 펼쳐보라. 어디에서 시작해도 좋다. 예술의 바다에서 항해하라! 

 

 

박정훈
서울대 미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