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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의 교훈
[글로컬 오디세이]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의 교훈
  • 윤용수
  • 승인 2022.05.05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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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윤용수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원장
이사벨라 1세 초상화(왼쪽)와 코르도바 메스키타 이슬람 사원의 십자가(오른쪽). 사진=프라도 미술관(왼쪽), 윤용수(오른쪽)

지중해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이베리아반도는 고대부터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유럽의 변방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피레네산맥 남쪽은 유럽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베리아반도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유럽의 변방이었던 이베리아반도는 이슬람을 만나 유럽의 선진 문화와 지식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이슬람이 지배한 8백여 년(711~1492) 동안에 이베리아반도는 역사상 가장 큰 발전과 번영을 누렸다. 

이슬람 지배 시기에 유럽의 젊은 지성과 학자들은 선진 문명을 배우기 위해 코르도바, 톨레도, 세비야로 몰려들었다. 코르도바 도서관에 소장된 44만 권 이상의 문헌은 당시 전 유럽 도시들이 소장한 문헌보다 많았다. 유럽이 여전히 양피지를 사용하고 있을 때, 안달루시아에는 종이가 보급되었고, 유럽의 밤이 횃불로 밝혀지는 어둠의 도시였을 때, 세비야의 밤은 가로등이 밝히고 있었다. 즉, 유럽 전체가 깊은 어둠에 빠져 있을 때, 이베리아반도는 문명의 횃불을 밝히고 있는 유럽의 오아시스였다. 한 마디로 유럽의 다른 도시와는 차원이 다른 도시였다.

이베리아반도의 이러한 문화적 발전과 성취는 이슬람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무슬림들은 토착민인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에게 종교적 관용(convivencia)과 함께 사회적, 경제적 자유와 권리를 함께 허용하는 공존을 선택했다. 

그 결과 안달루시아에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조화와 협력이 이루어졌고, 여기서 창출된 에너지는 이베리아반도를 최고의 선진 문화를 구가하는 중세 지중해 학문과 지식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8∼15세기 지중해를 지구사적 시각에서 보면 동쪽에 위치한 압바시야조는 번역을 통해 외부 세계의 지식을 아랍·이슬람 세계로 빨아들이는 문화와 지식의 흡입구 역할을 했다. 반면에 지중해 서쪽에 위치한 안달루시아조는 아랍어로 기록된 이슬람의 지식 체계가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지식과 학문의 배출구 역할을 수행했다, 즉, 지중해 동과 서의 두 축(바그다드, 안달루시아)을 중심으로 거대한 지중해 지식의 순환 체계가 무슬림들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이러한 지식 순환 체계는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지중해 전체의 문명과 지식 체계의 발전 및 고도화를 가져왔다.

1492년 리콘퀘스타(Reconquesta)가 완성된 이후, 이사벨라 여왕 중심의 통일 스페인 왕국은 해양 항로 개척, 신대륙의 발견과 해외 식민지 확장 등을 통해 빠른 속도로 제국주의화되어 갔고 15∼17세기에는 지중해 최강 국가로 발전하여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8백여 년 가깝게 이슬람의 식민 지배를 겪은 통일 스페인 왕국이 식민 지배를 벗어나자마자 단기간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과 원동력은 무엇일까? 물론, 리콘퀘스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립과 가톨릭 국가 회복에 대한 열망이 국민을 단합시켜 강성한 국가의 기반을 구축했다 할 수 있다. 또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인한 국부(國富)의 증가와 통일된 스페인 왕국의 시너지 등 다양한 요소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필자의 생각에는 상기 요인과 함께 이슬람 지배 시기에 이베리아반도에 축적된 국가 잠재력과 에너지가 발휘된 까닭이 아닌가 한다. 즉, 15세기 이후 통일 스페인 왕국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강성함은 문화 융합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발전시킨 이베리아인들의 문화적 지혜와 능력의 결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통일 스페인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통일 스페인의 국모로 칭송받았고, 교황청으로부터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예를 얻은 이사벨라 여왕이 스페인의 부국강병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주의자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종교 재판소를 통해 유대인과 무슬림을 탄압하며 학살했고, 그 결과 이들의 엑소더스를 초래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의 추방은 통일 스페인의 국가 발전 에너지의 감소와 소멸을 의미했다.

관용과 공존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축적한 통일 스페인은 종교적 차별과 순혈주의 정책을 통해 국력을 소진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즉, 콘비벤시아가 스페인의 영광을 만들었고, 종교적 순혈주의가 스페인의 몰락을 가져왔다 할 수 있다.

인류의 공영과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관용과 상호 교류를 통한 공존이며, 이기주의와 순혈주의는 몰락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의 역사가 21세기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역사는 끝없이 순환되고 반복된다. 분열과 독선은 모두의 패망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수없이 확인하면서도 21세기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똑같은 시행착오들이 반복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라는 망각의 부작용인가? 안타까울 뿐이다.

 

윤용수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원장
한국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아랍어 사회언어학이고 한국이슬람학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지중해문명교류사전』(공저, 2020), 『지중해문명교류학』(공저,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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