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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而不死 민영환' 展
'死而不死 민영환' 展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1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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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肖像畵. 조선시대 전통 초상화 기법으로 그린 민영환의 초상화. 젊은 시절을 모습이며 우측 상단에 민보국 휘영환이라 적혀있는데, 그림 그려진 이후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 고려대박물관 도록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러일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득의양양 달려와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조약내용이 알려지자 조선반도는 들끓었고 유생들의 반대상소가 이어졌다.

당시 정승으로 고종의 최측근이던 민영환도 백관을 이끌고 두번이나 피끓는 반대상소를 어전에 올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10일 뒤 민영환은 품에 지니던 작은 칼을 꺼내 몸을 수차례 찔러 자결했다.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국정을 주도해온 고위관리로서, 군주와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충정공 影幀.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축하절사로 참석하였을 때 러시아 수도에서 찍은 사진. 우측상단에 민영환이 직접 쓴 칠언절구가 적혀있다. 해석하면 "이 얼굴 한 농부에 지나지 않는데 / 경이 되고 장이 됨은 곧 무슨 일이던가 / 관직을 더럽혀 家聲을 실추시켰으니 / 감히 밝은 조정에서 백관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이다. © 고려대박물관 도록

최근 조선사회는 공사가 구분되지 못한 전근대 사회라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1908년 1월, 13도의병총대장 李麟榮이 거의 다 망한 왕조를 구하기 위해 서울로 진격하여 근교 30리까지 이르렀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졌다[天崩]”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에 따라 의병군도 해산하였다는 사실이 이와 관련해 자주 언급된다. 또한 고종이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가오자 옷을 버릴까봐 관리들이 대열에서 이탈해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도 같이 언급된다.

하지만 이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라는 근대적 내면의 형성과 관련해서 일률적으로 논의할 사항인가는 의문이다. 위의 민영환의 사례에서 보면 그는 공적으로 수행하는 일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이 따라야 하는지를 평소에 잘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을 직접 실천에 옮기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튼 민영환의 죽음이 알려지자 의분에 찬 이들이 연쇄적으로 뜻을 같이 해 자결했다는 소식이 이어졌으며, 조선의 젊은이들은 국권침탈을 충격적으로 수용하는 계기가 됐다.

충정공 민영환의 유품전이 그의 순국 1백주년을 맞아 고려대 박물관(관장 최광식 교수)에서 지난 11월 30일부터 1월 29일까지 열리고 있다. 민영환의 후처였던 박수영 여사(정경부인 밀양 박씨)가 유품을 간직했다가, 그 손자인 민병기 前 고려대 교수가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이번에 공개되는 것이다.

유서(위)와 칠언율시(아래). 盡日行行錄樹陰 / 有時住杖聽幽禽으로 이어지는 이 율시는 1905년 초여름에 읊은 것으로 자연경관을 기울어져가는 구한말의 국운에 결부시켜 애국애정을 표현했다. 번역하면 "종일토록 녹수 그늘에 오락가락하면서 / 때로는 지팡이 멈추구 유금소리 듣는다. / 늙은 꿩은 까투리 끼고 교만하게 다가오는데 / 새 꾀꼬리는 새끼 이끌고 교묘히 숲을 뚫는구나. / 서성거림은 들어앉을 집이 없어서가 아닌데 / 조정을 바라보니 사직이 무너진 것 부끄럽도다." ©고려대박물관 도록. 

이번 전시회에는 민영환의 초상화를 비롯해, 인장, 의복, 그가 관직을 명받았던 각종 교지와 칙명, 서간, 글씨, 사진, 그림 등이 전시된다. 특히 그가 자결하기 몇시간 전 명함의 앞면과 뒷면을 이용해 연필로 빽빽히 적었던 유서도 있다. 급히 흘려 쓴 글의 내용은 "국가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자신의 잘못을 온 동포에게 사죄하고 앞으로 이천만 동포들이 마음을 굳게 먹고 학문에 힘쓰며 일치단결하면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니, 조금도 실망하지 말고 분발하라"는 것이다.

이 혈죽은 일제강점기 때 민영환의 부인인 박수영 여사가 광목천에 싸서 다락방에 몰래 보관하여 왔던 것이다. 혈죽을 넣는 오동나무에는 조동처가 쓴 글이 있는데 "이 혈죽이 1906년 2월 자라나서 이해 9월에 시들었다"고 되어있다. ©고려대박물관 도록. 

민영환이 자결한 뒤 그가 남기고 간 피 묻은 옷과 칼을 마루방에 봉안했는데, 이듬해 7월 그곳을 열어보았을 때 마루 틈에서 4줄기, 9가지, 48잎사귀가 돋은 푸른 대나무가 솟아있었다. 포은 정몽주의 다리에 선죽이 돋았듯, 유서에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 그가 혈죽을 피워올렸다며 이 사실은 언론에 대서특필됐고, 그의 집엔 혈죽을 확인하려는 인파로 들끓기도 했다. 당시 일제는 이 혈죽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여 마루를 뜯고 땅을 파서 조사한 뒤 대나무를 뽑아버렸는데, 이를 박씨 부인이 잘 간직했던 것이다. 이 혈죽도 이번 전시회에서 만나볼 수 있다.

민영환의 혈죽을 그린 그림. ©고려대박물관 도록 
민영환의 삶에 대한 관심은 민족주의적 애도에 그치지 않는다. 전시도록의 뒷편에 실린 마이클 핀치의 논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국권상실의 결정적 시기 집권세력의 핵심인물로서, 그의 삶에 대한 관심은 과연 당시 한국의 지도층들은 무엇을 생각했고, 어떤 노력을 했느냐에 대한 앎의 추구와 연결되어야 마땅하다.

그간 학계에서는 권문세가의 핵심 인물이라 하여 민영환에 대한 연구는 뒷전인 감이 없지 않았는데, 마이클 핀치는 선행연구에서 민영환으로 대표되는 개혁프로젝트는 어떤 것이었고 실현가능했는지, 그에 대한 민중의 이해와 반대는 어떠했는지, 갑신정변과 같은 서구모델에 입각한 엘리트 중심의 위로부터의 혁명과 동학농민봉기 같은 밑으로부터의 혁명, 그리고 집권세력 자체에 의한 체제개혁은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기도 한다.

민영환은 '千一策'을 저술해 국방대책(일본과 같은 침략국에 대응한 군비의 강화), 산업발전(부국자강의 실현을 위한 산업의 진흥), 국가기강 확립(법질서의 확립)을 강하게 주장한 개혁세력이었고, 또한 고종의 최측근이면서도 독립협회 세력을 지원해 직위에서 해제되기도 한 뚜렷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 민영환에 대한 연구는 매우 소략하다. 국회도서관에 논문을 검색해보면 총 13편이 뜨는데 이 가운데 7편이 2001년 이후 쓰여진 것들이다. 이 중에서도 본격적인 것으로 보이는 논문은  ‘민영환의 정치활동과 개혁론’(김도형) 정도가 유일해보인다. 학계의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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