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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학문분야별 번역 트렌드 점검-인문학
기획특집: 학문분야별 번역 트렌드 점검-인문학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5.12.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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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아렌트 등 지속적 ‘붐’…종교학 ‘다양화’ 이뤄지나

2005년 번역출판의 트렌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원전출판과 인기사상가들의 저서출판으로 대별된다는 것이다. 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고전번역 지원에 의한 결과물이 속속 나오고 있으며, 그로 인해 대사상가들의 빈틈이 점점 메워지는 모습은 보기에 흐뭇하다. 하지만 일부 어려운 사상가들의 주저는 번역되지 않고 있어 아쉽다. 한편 들뢰즈, 촘스키, 도킨스 등의 지속적인 인기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편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현상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벤야민과 아렌트의 주요한 저작들이 번역돼 나오면서 관련 연구자들의 관심을 촉발하기도 했다. 

 철학 및 인문학 분야

서양철학 쪽의 올 한해 번역물들을 훑어보면, 그간 해당전공자들이 전집, 선집번역을 비롯 한 사상가의 사상을 모두 번역해내겠다는 의지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작업들이 많았다. ‘니체 전집’의 완간(2, 6, 9, 12, 19권은 올해 출간)이 대표적인 예이고, 하이데거의 번역(‘이정표’, ‘사유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베르그손 저서도 두권(‘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번역됐고 헤겔(‘정신현상학 1~2’, ‘청년헤겔의 신학론집’) 역시 시장에서 인기가 별로 없는 것과는 별도로 꾸준히 번역되는 중이며, 칸트(‘윤리형이상학 정초’ 외)도 마찬가지로 전공자들이 나서서 완성된 그림을 위해 내달리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붐을 이루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저술 번역이다. 올해 드디어 그의 주저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조형준 옮김, 새물결 刊) 1차분 2권이 번역되어 나온 것. 벤야민은 198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연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현대사회와 예술’ 등 몇 권의 역서가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중역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얼마 후 이러한 번역작업도 뚝 끊겼다. 이후 벤야민의 저서보다는 2차 연구서들이 소개되기에 바빴다. 즉 국내에선 미국을 통해 들어온 벤야민을 맛봐야 했으며, 모더니티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신비스럽고 난해한 이론가로 취급됐었다. 그러던 차에 올해 벤야민이 “나의 투쟁, 나의 모든 사상의 무대이다”라고 말한 13년간의 역작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나온 것. 더불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옮김, 그린비 刊)와 2차 연구서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효형 刊)도 출간됐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번역의 質이다.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번역자는 벤야민 전공자가 아니며, 영어전공자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 “영어중역의 혐의가 제기되며 향후 번역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라는 게 몇몇 전공자들 견해다. 어쨌든 논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가운데, 벤야민의 다른 주 저서들의 번역에 전공자들의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현재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 윤미애 중앙대 강사, 김영옥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이 뜻을 모아 주어캄프판 10권을 출간계획하고 있는데, 늦어도 내년 1월 내에 ‘일방통행로’(One Way Street)와 ‘사유이미지’(Thought Image) 등 3권이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이들은 아포리즘에 관한 벤야민의 주저로 파격적인 실험을 보여주고 있고 국내엔 처음 소개된다. 앞으로 1년에 3권씩 벤야민 번역서가 출간될 계획이다. 

1차 저술번역 활발…2차 연구서 아직

고대철학 부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刊) 번역 역시 국내 학계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초에 플라톤전집을 번역하려고 모였던 정암학당 멤버들이 우선 단편선집부터 선보인 것. 워낙 번역이 쉽지 않은 분야임에도 김재홍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 등 3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번역을 진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06년 학술진흥재단 번역과제로 김남두 서울대 교수가 플라톤의 마지막 대화편 ‘법률(Nomoi)편’을, 조대호 연세대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ca)을 맡게 됐다. 하지만 몇몇 아쉬움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김주일 성균관대 강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Physica’도 중요 저작인데 아직 번역서가 없으며, ‘정치학’의 재번역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라고 말한다. 롱 앤 새들리(Long & Sedley)의 것도 “교양적 수준’에서 반드시 번역되어야 할 책들”이라는 의견들이 제기된다. 이들 역시 헬레니즘 철학을 위한 증언과 단편 모음들인데, 유럽에는 포켓판으로 널리 공급되고 있다는 것. 그 외 장 볼락(Jean Bollack)의 엠페도클레스 단편 모음 및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개괄서인 ‘Emp럅ocle’(1~3) 역시 “번역됐으면” 하는 저서로 꼽히기도 한다. 어쨌든 현재 플라톤 전집조차 완간되지 못한 서양고대철학계의 부끄러운 현실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플라톤의 ‘국가’만 십 수종 번역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인기종목에만 번역이 편중된 탓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들뢰즈 서거 10주년을 맞아 올해 들뢰즈 관련 번역도 화려했다. 저서로는 ‘중첩’(허희정 옮김, 동문선 刊), ‘비물질노동과 다중’(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 刊)이 번역됐고, ‘들뢰즈와 맑스주의’(니콜래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刊), ‘들뢰즈와 정치’(폴 패튼 지음, 백민정 옮김, 태학사 刊), ‘들뢰즈 커넥션’(존 라이크만 지음, 김재인 옮김, 현실문화연구 刊), ‘싹트는 생명-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이정우 옮김, 산해 刊),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지음, 김지훈 옮김, 그린비 刊) 등 2차 연구서도 번역돼 들뢰즈 연구가 풍부해진 한해였다. 원래 ‘10주년’이란 타이틀이 그러하듯 때맞춰 준비해뒀다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지만, 사실 국내 철학계는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가 과도한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우려를 염두에 둔다면 과도한(?) 붐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저서들 역시 번역의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올해에는 ‘과거와 미래사이’(서유경 옮김, 푸른숲 刊)가 출간됐는데, 이로써 아렌트 저서가 8권이 번역출간 됐다. 곧이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치(학)의 약속’ 등도 번역될 예정이라 하는데, 아렌트 주저가 거의 완간을 눈앞에 둘만큼 번역이 활발한 수 있었던 건 1995년 즈음 아렌트 재조명이 해외에서 이뤄지면서 국내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들이 곧 아렌트 번역에 부지런히 뛰어들었던 것. 물론 서유경 경희대 교수 등은 “일본은 아렌트 학회도 있고 저술도 1970년대 이미 다 번역됐다”라면서 국내 상황이 매우 뒤쳐졌음을 질타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2차 연구서번역에는 전공자들도 손길을 뻗치지 못하고 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등 주요 연구서 한둘은 나왔지만, 그 외 중요한 연구가인 벤하비브, 번슈타인, 카노반 등의 연구물들이 국내에 소개돼 아렌트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시간을 좀더 두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철학 쪽에선 재탕삼탕 번역돼 출판시장을 불균형하게 만드는 단골메뉴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쇼펜하우어의 저서들도 그에 속할 테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록’은 올해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역서(숲 刊)가 나옴으로써 “오랜만에 제대로 된 번역이 나왔다”는 평을 얻고 있다.

한편, 알려진 명성에 비해 정작 저서들은 별로 소개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아쉬움을 사는 사상가들도 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예다.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는 “비트겐슈타인 논문이나 해설서는 많은데 정작 저서들이 많이 번역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또 프랑스 철학자 중 “자크 랑시에르나 필립 라부-라바르트의 책들이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는 건 이상하다”라는 의견도 있다.

브루스 링컨 첫 번역 나와

신화학에선 드디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임봉길 옮김, 한길사 刊) 1권이 번역돼 나왔다. 총 4권인데 내년에 2권이 출간될 예정. 그간 레비-스트로스는 ‘슬픈열대’, ‘야생의 사고’ 등이 널리 읽혀왔지만, 사실 이들은 그의 사유과정 중에 나온 저서들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이 집약된 가장 중요한 책은 ‘친족의 기본구조’와 ‘신화학’이다. ‘신화학’은 아직 일본에서도 번역되지 못했으며, ‘친족의 기본구조’ 역시 너무 어려운 작업이라 국내에선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올해 레비-스트로스의 사유들이 담긴 ‘보다 듣자 읽다’(고봉만 외 옮김, 이매진 刊)도 번역돼 나왔는데, 어쨌든 이러한 주변적 저서들을 맛보며 주요 저서 번역은 좀 기다려야 할 상황이다.

종교학에서는 엘리아데의 역작 ‘세계종교사상사 1~3’(이용주 외 옮김, 이학사 刊)가 빛을 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종교학계의 거장 엘리아데의 사상은 국내에 거의 다 소개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사상의 ‘다양성’을 맛보여줘야 한다는 것. 그간 국내에선 엘리아데가 우뚝 솟아있었고, 그 주위로 윌리엄 페이든과 니니안 스마트 정도의 저서만이 번역 소개됐을 따름이다. 그러던 차, 올해 처음으로 반갑게 접한 얼굴이 브루스 링컨이다. 그의 ‘거룩한 테러’(김윤성 옮김, 돌베개 刊)가 출간됐는데, 엘리아데의 제자이면서 그와는 다른 이론적 입지를 구축한 저명한 종교학자임에도 그간 국내에선 번역된 바가 없었던 것. 김윤성 한신대 교수는 “종교학과 학부생들이나 대학원생들에겐 기본 커리큘럼에 속하며, 인문학적 관심사에서도 읽어봐야 할 책인데 그동안 번역상황이 너무 척박했다”라고 덧붙인다. 사실 그의 이론적 입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저로는 ‘Discourse and the Construction of Society’와 ‘Authority’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향후 종교학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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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성 2005-12-13 16:35:46
인터뷰할 때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제 직위는 '교수'가 아니라 '연구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