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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서적 번역, 인문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시금석”
“한자서적 번역, 인문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시금석”
  • 원용준
  • 승인 2022.04.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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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설문자해주』 이충구 책임번역 | 김규선 외 3인 공동번역 | 전통문화연구회 | 424쪽

한자사전 기능 넘어 우주구성의 원리 설명
중국 출토문헌으로 한자의 기원도 함께 수록

2019년 학술회의에 참석하려 파리에 갔을 때, 짬을 내어 프랑스 국립 동양언어문화대학(Inalco)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깜짝 놀란 것은 ‘한국학과’의 인기였다. ‘중국학과’나 ‘일본학과’에 다니는 학생들보다 ‘한국학과’ 학생들이 훨씬 많았고, 그들이 한국에 대해 공부하고 활동하는 모습에서 진지함이 느껴졌다. 

 

한국영화가 그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주요 상을 휩쓸며 4관왕에 오른 것이나 BTS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수많은 팬들(아미)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건 놀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겠구나 하고 납득했다. 휴대폰, IT기술, 첨단과학의 분야에서도 한국이 만든 것, 한국이 연구한 것이라면 뭐든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그렇지만 소위 ‘한류’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이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들이 처음에는 영화가, 드라마가, 대중음악이 좋아서 한국에 관심을 가졌지만 한국이 식민지 시대를 거쳤으며, 해방후 전쟁으로 인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면 실망하지 않을까.

 

우리는 한국문화·예술·철학을 잘 알고 있나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한국이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며, 문화, 예술, 철학 방면에서 매우 뛰어난 성과를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해 왔다는 것에 더욱 감탄하리라.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선조가 쌓아올린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잘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는 홀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점이다. 필자는 그 가장 큰 이유가 우리 전통문화의 업적 대부분이 한자, 한문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한자는 어려운 글자가 되었다. 우리는 굳이 한자를 쓰지 않더라도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 내 생각을 글로 써서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고, 다른 이가 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한글이 그만큼 우수하고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가 만들어냈던 것들, 우리 전통적 문화, 예술, 철학이 어려워져 버렸다.

『설문해자(說文解字)』는 그 어려운 한자의 세계를 인도하는 가장 기초적인 서적이다. 이 책은 후한시대의 허신이 저술한 최초의 한자사전이지만, 그 내용은 단순한 사전적 기능을 초월하고 있다. ‘일(一)’에서 시작하여 ‘해(亥)’로 마치는 구성부터가 우주구성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하나의 철학적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설문해자』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 청대 고증학의 천재 단옥재(段玉裁)가 저술한 『설문해자주』이다. 문제는 『설문해자주』 자체도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소수의 전문가가 아니면 접근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한글화와 문화콘텐츠

한자가 어렵고 한문이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이 같은 기초서적조차 번역되지 않아 우리가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번역되자 조선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수준 높은 문화콘텐츠들이 생겨났고 이것이 한류로 연결되었다. 『설문해자주』 연구번역서 발간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단법인 전통문화연구회는 지난달 『설문해자주』 제1권 발간을 시작으로 앞으로 2030년까지 완역할 예정이다. 이 책의 연구번역에 참여하고 있는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 제1권만 읽어보더라도 이 책의 가치는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이 책이 번역만을 싣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연구번역서에는 한자의 자원(字源)에 대한 설명이 부가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한자학의 최첨단 연구 성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갑골문, 금문, 죽간, 백서 등 출토문헌을 통해 한자의 자원을 명쾌하게 밝혀내고 있다. 20세기 이후 중국에서 발견되고 있는 엄청난 수량의 출토문헌은 한자의 기원과 전개 과정에 숨어있던 많은 수수께끼들을 풀어주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연구 성과를 담아냄으로써 고전적인 내용과 현대의 최신 정보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노벨과학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때마다 기초학문의 부재를 언급한다. 이것이 비단 과학의 일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설문해자주』 연구번역서의 발간은 바로 인문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아울러 한국전통문화에 뿌리를 둔 수준 높은 고급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일에도 일조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용준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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