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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시각에서 동북아 탈구축해야
동남아 시각에서 동북아 탈구축해야
  • 하세봉 부산대
  • 승인 2005.12.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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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APEC 관련 국제토론회에 대한 비평

▲APEC2005 국제심포지엄: 아시아의 새질서와 연대의 모색 ©

11월의 부산에는 동아시아-태평양이라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불고 갔다. 11월9일에는 동북아시대위원회 이수훈 위원장의 간담회가 있었고, 11-12일에는 “APEC2005 국제심포지엄: 아시아의 새질서와 연대의 모색”(이하 “심포지엄”으로 약칭)이라는 주제로 수억이 넘는 경비가 들었을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렸으며, 16-17일에는 APEC을 반대하는 “부산국제민중포럼”(이하 “민중포럼”으로 약칭)이 열렸다. 그리하여 18-19일의 APEC회의를 정점으로 회오리의 막이 내렸다. 역사적인 동아시아를 탐색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모임이 현실의 동아시아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3개 국어로 동시통역된 “심포지엄”에  한, 중, 일의 학자는 물론 동남아시아, 미국의 학자들도 참석하였고, 영어로 동시통역된 “민중포럼”에서도 한, 일, 홍콩의 사회운동가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 뉴질랜드의 사회운동가들도 참석했다. 아시아‧태평양 연안에서 모여든 이들이 다루는 주제는 매우 달랐지만 동아시아가 하나의 범주 혹은 마당이 되어 논의를 진행한 점은 동일했다.  우리 속에 살아 움직이는 동아시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는 “민중포럼”에 참가한 ‘부산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들은 아시아 이주노동자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영어 소식지 “Asian Workers News"를 2005년11월 현재까지 199호를 발간했다.


현재 동아시아 각국 가운데 가장 ‘동아시아’를 힘주어 말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인데, “심포지엄”은 동아시아 속에서 한국이 자임하는 균형자로서의 역할이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 국제적으로 검증해보자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포지엄”에서 발표‧토론자들의 다양한 대답을 묶어본다면 한국의 균형자 역할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로 종합할 수 있겠다. 다만 발제문과 토론에서 ‘균형자’라는 용어 대신에  빈번하게 등장한 ‘안정자’ ‘중재자’라는 용어는 이웃 나라가 균형자 논리를 그다지 수긍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특히 ‘균형자’의 영어번역 ‘밸런스’가 오해를 산다든지 연성균형(소프트 밸런스) 등에 관한 논의는 냉전체제 이후 현재까지 줄곧 미국을 빼고서는 논의될 수 없는 동아시아의 국제적 현실을 보여준다.


이번 토론회에 드러나는 특징의 하나는 동아시아 논의에서 동남아시아가 전면에 부상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의 동아시아 논의는 한, 중, 일의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한자문화권을 포괄하려고 할 때, 베트남이 거론된 정도였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동남아시아 학자와 운동가가 발표와 토론에 다수 참여하고 각종 현안을 동아시아의 지평에서 논의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변화이다. “심포지엄”에서도 “민중포럼”에서도 미국인의 발언이 한국언론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이와 같이 APEC을 운영하는 국가권력과 APEC에 반대하는  사회운동 조직이 대립하면서도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토론회에서 동남아시아는 우리에게 두 가지 점을 발신하고 있다. 하나는 소수자의 역할이다. ASEAN의 경제규모는 한국과 비슷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 중, 일이 ASEAN+3과 같이 ASEAN에 더부살이를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이번 12월 말레이지아에서 열릴 동아시아정상회의의 참가범위를 인도, 호주로 까지 범위를 넓히는데 발언력을 행사한 쪽도 ASEAN이었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ASEAN의 이러한 위상은, 국력과 무관하게 지역주의를 선도한 조직으로서, 소수자의 역할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아시아 논의를 선도함으로써 한국이 소수자이기는 하나 입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힘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생존전략으로서 평가될 가치가 있다.  


둘째로는 동남아시아에서도 국민국가와 근대성의 완성이 다급한 일이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상당히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태국의 역사교과서가 피해와 영광의 역사로 엮어져 있다는 “심포지엄”에서의 발표는 동남아시아의 역사교과서가 동북아시아 각국의 역사교과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음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지식은 오해와 편견을 증폭시키고 급기야는 태국인과 캄보디아인 간에 폭력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국제포럼”은 태국 등에서도 공공사업의 민영화가 진행되는 현실을 보고하여, 동아시아에서 공시적으로 진행되는 경제효율 우선 정책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런데 한국학계가 숙제로 안아야 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의 안경으로 동남아시아의 공통성을 확인하는 지적 행위 보다는 동남아시아의 현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관점으로 동북아시아를 탈구축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반드시 지리적인 동남아시아를 지칭하지 않아도 좋다. 동북아라고 할 때 연상되는 지리적 위치의 무게중심은 러시아도 포함하는 중국의 중부 이북이다.  북위 27도 이북은 러시아, 중국, 남북한, 일본같이 국경이 분명하고, 인종적 단일성이나 언어의 통일성이 비교적 강하다. 그러나 오키나와, 푸젠성 윈난성, 타이완, 홍콩이 포괄되는 북위 27도 이남 지역은 전형적인 동북아보다 상대적으로 다종교, 다민족, 다언어, 다국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남아에 근접하고 있다. 동아시아라는 패러다임의 핵심적인 의의는 양자적 관계가 아니라 다자적 관계로서 사물을 이해하려는 점에 있다면, 동남아시아는 다자적 관계가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어 있는 세계이다.  동남아시아는 20세기적 패러다임과 작별하고 21세기를 향한 패러다임을 발굴할 때, 유용한 보고일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국력이나 인구의 비대칭성이 문제라면, 시민사회 성숙도의 비대칭성도 역시 문제이고, 이 점은 부산의 토론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동아시아 논의에서 연대를 말할 때, 그 연대의 대상은 주로 시민운동세력인데,  “심포지엄”에서 중국의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참석자는 없었다. 타이완은 시민사회의 활동이 활발하나, 타이완에서 온 발표자도 시민운동가도 없었는데, 이는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시선에 매몰되어 타이완을 경원시하는 한국 진보진영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민중포럼”에서도 홍콩의 운동조직의 홍보가 두드러졌지만 중국의 사회운동가는 없었다.


이러한 점은 중국이 동아시아를 호명하는데 인색한 사실과 함께 장차 추진될 동아시아 공동체가 국가 중심으로 흐를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만든다. 국가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꾸려질 때, 국력의 비대칭성은 소국의 입지를 좁힌다. 특히 국가이기도 하고 국가가 아니기도 한 소수자의 입지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단적인 예가 타이완이고 홍콩도 그러하다.  APEC회의에서 국가수반을 보내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타이완이었다. 타이완 정부는 원래 왕진핑 입법원장을 총통 대리인으로 파견하려 했으나 중국의 반대로 절충했다고 한다. 홍콩이나 타이완은 APEC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국가이면서도 국가로서의 발언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동아시아근대사가 낳은 불구의 국민국가이다. 그러나 21세기 동아시아의 질서가 국가단위를 넘어서기 위해설 수 있는 실마리는 이와 같이 애매한 국민국가 속에 내장되어 있을지 모른다. 


“심포지엄”은 부산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이라는 ‘도시’ 내지는 ‘지방’은 실종되었다. 발표와 토론 속에 지방과 관련된 언급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심포지엄”의 발표토론자 39명의 거주도시를 보면, 서울, 도쿄, 베이징, 뉴욕, 쿠알라룸푸르 등 대부분 각국의 수도였다. 개최 도시 부산의 학자는 2명의 토론자에 그쳤고, 발표장을 가득 메운 부산의 시민들은 수업받는 학생인 셈이었다. 반면에  “민중포럼”에서는 세계화가 지역을 파괴한다는 관점에서 국내 지역의 사례를 언급하고 거친 대안이나 투쟁방안을 내놓았다.  다만 이들의 대안에 동아시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논의에서 시민과의 연대는 아직 희망에 머물고 있지만, 국가 이상으로 근래에 활발한 움직임은 국경을 넘어선 동아시아 도시(지방) 사이의 교류이다. 


11월에 부산에 휘몰아쳤던 동아시아-태평양이라는 회오리바람이 확인시켜주는 요점은 하나이다. 즉 이미 어떠한 동아시아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동아시아의 실체가 무어냐는 의문은 일찌감치 무의미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동아시아인가 할 때, 국가이면서도 국가가 아닌 존재, 그리고 국가가 아니라 국가 간의 지방과 지방, 도시와 도시가 교류하고 발언하는 동아시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세봉(부산대학교  동아시아근대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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